이강철 r930 RAW 2022-06-22 16:45:09에 w2에서 r930판 포크됨[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정치인, rd1=이강철(정치인))] [include(틀:kt wiz/간략(코칭스태프))] ---- || '''{{{#ffffff 이강철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KIA 타이거즈 1차 지명선수)] ---- [include(틀:KBO 리그 감독)] ---- || '''{{{#ffffff 이강철의 감독직 / 기타 직책 역임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kt wiz 감독)] ---- [include(틀:두산 베어스 2군 감독)] ---- [include(틀:KIA 타이거즈 주장)] }}} || ---- || '''{{{#ffffff 이강철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파일:A4etEfi.png|width=50]][[파일:wuokE4a.png|width=50]][[파일:Ii0lZeU.png|width=50]][[파일:PccoW9i.png|width=50]][[파일:XmLbTVV.png|width=5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89년 한국시리즈|{{{#ffffff 1989}}}]]''' || '''[[1991년 한국시리즈|{{{#ffffff 1991}}}]]''' || '''[[1993년 한국시리즈|{{{#ffffff 1993}}}]]''' || '''[[1996년 한국시리즈|{{{#ffffff 1996}}}]]''' || '''[[1997년 한국시리즈|{{{#ffffff 1997}}}]]''' || ---- || [[파일:external/oi63.tinypic.com/244s6lk.png|width=7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 || '''[[2009년 한국시리즈|{{{#ffffff 2009}}}]]''' || ---- || [[파일:2021시즌 kt wiz 한국시리즈 챔피언 우승 엠블럼.png|width=auto&height=7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 || '''[[2021년 한국시리즈|{{{#ffffff 2021}}}]]''' || ---- ||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width=auto&height=70]][br]'''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d4af37 금메달(코치)}}}''' || || '''[[선동열호/2018년|{{{#FFFFFF 2018}}}]]''' || ---- || [[KBO 리그|[[파일:KBO 리그 아이콘.svg|width=25]]]] '''{{{#ffffff [[1996년 한국시리즈|{{{#fae7a6 KBO 한국시리즈}}}]]}}}''' [br] '''{{{#ffffff 1996 한국시리즈 MVP}}}''' || ---- ||<-2> {{{#ffffff 보유 기록}}} || || 10년 연속 10승 || 1989년~1998년 || || 10년 연속 100탈삼진 || 1989년~1998년[* [[장원준]]과 타이기록] || ---- ||<-5> '''{{{#ffffff [[해태 타이거즈|{{{#ffffff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김만후[br](1987~1988) || {{{+1 →}}} || '''{{{#ff0000 이강철[br](1989~1999)}}}''' || {{{+1 →}}} || [[박충식]][br](2000~2001) || ||<-5> '''{{{#ffffff [[삼성 라이온즈|{{{#ffffff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 || 이복연[br](1998) || {{{+1 →}}} || '''{{{#074ca1 이강철[br](2000~2001)}}}''' || {{{+1 →}}} || 이준호[br](2002) || ||<-5> '''{{{#fff [[KIA 타이거즈|{{{#fff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 || [[성영재]][br](2000) || {{{+1 →}}} || '''{{{#f01e23 이강철[br](2001)}}}''' || {{{+1 →}}} || 홍찬영 || ||<-5> '''{{{#fff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박충식]][br](2000~2001) || {{{+1 →}}} || '''{{{#f01e23 이강철[br](2002~2005)}}}''' || {{{+1 →}}} || [[신용운]][br](2006~2007) || ||<-5> '''{{{#fff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72번}}}''' || || 박창영[br](1995) || {{{+1 →}}} || '''{{{#f01e23 이강철[br](2006~2007)}}}''' || {{{+1 →}}} || [[장재중]][br](2008~2011) || ||<-5> '''{{{#FFFFFF [[KIA 타이거즈|{{{#FFF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 || [[김태룡(1968)|김태룡]][br](2004~2007) || {{{+1 →}}} || '''{{{#FFFFFF 이강철[br](2008~2012)}}}''' || {{{+1 →}}} ||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br](2013~2014) || ||<-5> '''{{{#fff [[키움 히어로즈|{{{#fff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9번}}}''' || || || {{{+1 →}}} || '''{{{#ffffff 이강철[br](2013~2016)}}}''' || {{{+1 →}}} || [[박도현(야구)|박도현]][br](2017~) || ||<-5> '''{{{#fff [[두산 베어스|{{{#ffffff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 || [[문동환]][br](2013~2016) || {{{+1 →}}} || '''{{{#ffffff 이강철[br](2017~2018)}}}''' || {{{+1 →}}} || [[이도형]][br](2019~) || ||<-5> '''{{{#fff [[kt wiz|{{{#ffffff kt wiz}}}]] 등번호 71번}}}''' || || [[이숭용]][br](2014~2018) || {{{+1 →}}} || '''{{{#ffffff 이강철[br](2019~)}}}''' || {{{+1 →}}} || 현역 ||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t wiz 이강철 감독 프로필.jpg|width=100%]]}}} || ||<-2> {{{#ffffff '''kt wiz No.71 [[감독#s-1.1|{{{#!wiki style="display: i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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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igers_new&no=9389220&page=1|#]]]||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강철 200승.jpg|width=100%]]}}}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출신 [[코치(스포츠)|감독]]. 은퇴 후 코치 생활을 거쳐 [[2019년]]부터 [[kt wiz]]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의 투수. 별명으로는 잘할 때는 아이언맨, 철동님, 킹갓철, 깡동님 등이 있고, 못할 때 한정으로 강Fe, 깡통님, 강페이, 실험좌, 20억, [[세이콘 드립|쇠이콘]]이 있다. ==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820000026396.jpg|width=100%]]}}} || 1989년, 해태에 입단한 국가대표 투수 3인방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조계현]]과 [[이광우]]. 3,500만원을 받고 입단했으나,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송진우(야구)|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4,200만원)을 받자 해태는 기를 세워준답시고 송진우와 같은 금액인 4,200만원으로 부풀려 발표했다. 막 입단한 선수의 기를 살려준다고 계약금을 부풀려 발표한 걸 보면 해태가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이강철은 1989년 데뷔시즌부터 15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통산 5번째 우승[* 과거의 전후기 시즌제가 단일 시즌제로 바뀌고 치른 첫 한국시리즈였는데,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서 1위 빙그레를 한국시리즈에서 누르고 우승했다. 그러나 다음 2위 우승은 무려 29년 뒤인 2018년 [[SK 와이번스]]가 달성하게 된다. 그 외에 1992년(롯데), 2001년(두산), 2015년(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들(양대리그였던 1999~2000년 시즌은 제외)은 정규시즌 1위팀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했다.]에 기여했으며,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인 1998년까지 매년 150~200이닝을 기록하면서도 평균자책점은 최대 3.64만 기록할 정도로 기복없는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해태 왕조의 9번째 우승까지 큰 공헌을 했다. 또한 평균 자책점 2점대도 2번이나 기록했고 15승 이상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화려함도 갖추었던 선수였다. 이강철하면 떠오르는 '''10년 연속 10승 100탈삼진'''[* 장원준도 10년연속 100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강철은 최소 119개였던 반면 장원준은 102, 103, 107, 108개 등 조금 아슬아슬하기도 하였고 최다삼진도 이강철이 크게 앞선다.]의 기록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다. 선발투수 10승 하면 타자 3할과 비슷한 대단한 기록이었지만 이강철이 딱 10승하면 겨우10승? 정도로 너무 당연한 기록이었던 것. 또한 1996년의 경우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1완봉 평균자책점 0.56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고, 부상으로 [[현대정공]]에서 출시한 [[현대 싼타모]]를 받았다. 1998년에는 투수임에도 이례적으로 팀 주장을 맡아 고참으로서 선수단을 이끌기도 하였다. [youtube(6tiR9XNQe9E)]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527220238468B3.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815231402355B3.jpg|width=100%]]}}} || 1998 시즌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1999 시즌을 통째로 쉰 후,[* 당시 이강철의 이탈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나마 [[곽현희]]가 팀내 최다승인 11승을 거뒀지만 방어율이 무려 '''6점대'''였다. 나머지 투수들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엄청난 타고 시즌이지만 타선이 210홈런을 치면서 역대 최강에 근접하는 포스를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이강철의 부재가 너무나 뼈 아팠다. 특히 이강철의 이탈이 팀에 큰 구멍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는데, 2년간 WAR 13에 20승 60세이브를 거두었던 [[임창용]]이 9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선발진의 무게감을 양분하던 [[이대진]]도 이 해에 어깨 부상으로 인한 재활의 터널에 들어갔다. 거기에 어린나이에도 선발로테이션을 훌륭히 책임지던 [[김상진(1977)|김상진]]은 위암으로 인해 22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했다. 즉 1998년 팀의 핵심투수 4명이 이듬 해 이대진의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전부 이탈해버린 것이다.] 2000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3년 간 8억 원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맺고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 당시 FA 보상선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박충식]]이었다. [[박충식]]은 고향 팀 해태로 이적한 후 해태의 열악한 재활 시스템에 기겁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해태 타이거즈]]와 [[박충식]] 항목 참조.] 그러나 무릎 수술 후유증과 노쇠화가 겹쳐 2000시즌은 평균자책점 7.30 1승 4패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해오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결국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1년 7월 30일 2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돌아갔다.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이후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자책점 2.79 17승 29홀드 33세이브 WAR 7.08'''을 기록하며 계투로나마 부활을 알렸고, 특히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각각 '''66경기 105이닝, 67경기 68이닝, 79경기 85이닝'''을 소화하며[* 이때 그는 역대 만 36~38세 선수 중 최다 등판을 기록하기도 했다.당시 계투가 엄청나게 불안했던 KIA에서 팬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하고 볼 수 있었던 중간계투는 이강철과 [[신용운]] 뿐이었다.] 롱릴리프, 셋업맨,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2004년 말부터 다가온 노쇠화와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5 시즌 종료 후 2006년 4월 11일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https://blog.naver.com/hisjini/50051431953|은퇴식 당시 사진 모음]], [[https://www.youtube.com/watch?v=gVejemt3WcA|은퇴식 영상]] 그러나 동시대에 해태에서 함께 뛰었던 선배 '''[[선동열]]''', 동기생 [[조계현]], 그리고 후배 [[이대진]]과 [[임창용]] 등이 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2인자로 인식되었다.[* 해태의 모든 투수들은 좋든싫든 선동열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선동열과 동급으로 꾸준하게 활약했다고 할 만한 투수는 전성기의 최동원, 김시진, 최근의 류현진 정도이다.][* 심지어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팀의 우승, 프로 선수로서 본인의 유일한 공식 수상이었던 한국시리즈 MVP 획득에도 불구하고, 4차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현대 정명원이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웃지못할 일마저 벌어졌다.] 어떻게 보면 이강철은 단순한 기록의 비교 뿐 아니라 선동열을 중심으로 했던 80년대 말~90년대 초반 해태의 마운드 운영으로 손해를 본 셈이라고할 수도 있었다. 기껏 선발로 나와 잘 던지다가 5회 아웃카운트 1~2개만 남기고서 흔들린다 싶으면 바로 선동열로 교체해 승수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얻은 승수는 많았지만[* 특히 1992년 다승 2위였던 18승 중 17개가 선발승이었는데 이 것은 역대 잠수함 투수 최다 선발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을 제외하면 큰 경기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있으며,[* 통산 포스트시즌 방어율이 4.12로 나쁘지 않지만 93년(평균자책점 7.71)과 97년 한국시리즈(1회 5실점 강판)에서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크고, 더욱이 말년 마지막 포스트시즌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안경현]]과 [[홍성흔]]에게 2방이나 얻어맞은 모습 때문에 더욱 그렇게 비추어졌다. 그에 비해 선동열이 포스트시즌에서 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약했던 모습도 평균자책점 2.24(한국시리즈 한정 1.74)였으며 [[문희수]]나 [[김정수(1962)|김정수]]같이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난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들이 많아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작 시즌 최다승을 기록한 1992년과 [[이종범]]의 일본진출과 모기업의 몰락으로 해태가 망하기 시작한 1998년을 제외하면 그가 팀내 최다승을 거두지 못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점이 떨어졌던 것도 있다. 또한 선동열이나 조계현, 이대진보다 비교적 피홈런도 많았던 선수였기 때문에[* 통산 피홈런이 조계현의 2배 가까이 된다.] 더욱 선입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이강철이 선수 시절에 거둔 기록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5회에 [[1996년 한국시리즈]] MVP 경력과[* 다만 이 부분은 해태 시절 선배였던 [[김정수(1962)|김정수]]가 앞서는데, 우승 8회에 1986년 KS MVP 그리고 통산 한국시리즈 최다승 경력이 있다.] 위의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릿수 승과 3자릿수 탈삼진'''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기록. 10년 연속 3자릿수 탈삼진만 해도 역시 굉장한 기록인데 2017년 [[장원준]]이 타이를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우위가 갈리는 시즌이 뚜렷한데,(1989~92는 이강철 우세, 1993~96은 조계현 우세, 이후 다시 이강철 우세) 이강철은 탈삼진에서만큼은 조계현한테 한번도 밀리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2018년 기준, '''통산다승 3위, 통산이닝 3위, 통산 삼진 2위, 통산WAR 6위, 통산완투 6위, 통산완봉 5위,''' 등, 양적 통산성적에 관련해서는 KBO리그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대선수임에 분명하다. 선동열을 제외하더라도, 90년대 타이거즈를 함께 지탱했던 조계현의 1993~96년과 이대진의 짧고 강했던 전성기인 1995~98년이 워낙 좋았던 점도 있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에는 팀내 최고 에이스 자리를 맡았지만 데뷔시즌부터 4년 평균 200이닝이 넘는 혹사를 당한 여파인지 1993~96년에는 조계현에게 확실히 밀렸고, 그때 조계현은 4년간 60승을 거두며 해태의 에이스자리를 꿰찼으며, 조계현의 경우는 당시 2년간 왕좌를 양분하였던 [[LG 트윈스]]에게 12연승을 거두며 절대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탓도 있다. 거기에 1995년부터 기량이 만개해 4년간 평균 2점대 방어율에 59승을 쌓으며 탈삼진 1위를 2번이나 석권한 [[이대진]]의 활약이 너무나도 커[* 1998년의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사실상 1997년,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1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의 에이스 호칭은 이대진에게 내주는 등 2인자 이미지가 굳어진다.[* 사실 이대진과의 공헌도 차이는 두 해 다 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팀의 에이스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또한 이대진 뿐 아니라 1997,98년의 타이거즈 투수진 운용의 핵심키를 가진 투수는 임창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임창용은 '''2년간 123경기에서 268이닝 평균자책점 2.11 22승 60세이브 261삼진 WAR 13.29''' 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투수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승과 150이닝, 100삼진을 꾸준히 챙기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90년대 타이거즈 왕조에 큰 역할을 했던 스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90년대에 이강철은 프로 입단 동기인 [[송진우(야구)|송진우]]와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입단 당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고 이강철도 같은 금액으로 부풀려 발표했었고,[* 실제로는 이강철이 적음] 1992년에는 [[송진우(야구)|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했는데, [[김영덕]] 감독의 노골적인 다승왕 만들어주기를 등에 업은 [[송진우(야구)|송진우]]에게 아쉽게 패한다.[* 1992년 빙그레와 해태는 시즌 마지막 2연전에서 대결했는데, 첫 경기에서 [[장종훈]]의 시즌 40홈런 달성 등으로 빙그레가 여유있게 앞서자 김영덕 감독은 잘 던지던 선발 [[한희민]]을 5회부터 송진우로 교체해 당시 이강철과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였던 송진우에게 1승을 선사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직접적 경쟁 당사자의 팀을 상대로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시도하니,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다.][* 이강철은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서 '공동' 다승 1위의 가능성에 도전했지만, 장종훈의 시즌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본인이 회상하길 처음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아깝다고 얘기를 하니 허탈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고.[* 하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송진우(야구)|송진우]]를 선배로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한다. 당사자인 [[송진우(야구)|송진우]]는 "내가 아는 강철이는 그런 말 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출처 - 1992년 10월 7일 주간야구)] 그 해에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92년 당시에는 탈삼진 타이틀이 없어서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해인 1993년에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되었다.]또 12년 뒤 [[선동열]]의 통산 최다 탈삼진을 경신했지만 그마저도 [[송진우(야구)|송진우]]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송진우 뿐 아니라 주로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꾸준하게 선발로테이션을 지켰던 [[정민철]]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누적 스탯은 정민철이(sWAR 정민철 60.02 이강철 50.75), 비율 스탯은 이강철이(스탯티즈 기준 ERA+ 정민철 117.9 이강철 123.8) 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둘은 같은 16시즌을 뛰었다.] 그러나 다른 누적스탯인 탈삼진에선 이강철이 (1749 vs 1661), 비율스탯인 FIP+에서는 정민철이(스탯티즈 기준 정민철 116.3 이강철 109.2)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전반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비슷해 보이지만 WAR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정민철의 근소 우위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이버 스탯으로 가지 않아도 정민철은 90년대 당시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에 해외진출까지 성공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플레이 스타일 == [[파일:attachment/이강철/52e8ec121dc1d32f54fb.gif|width=400]] [[선동열]]의 별명이 무등산 폭격기였다면, 이강철의 별명은 "무등산 핵잠수함"이었다.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스로|언더핸드]] 투수로 유명했다. 전성기 시절 빠르지 않은 130 중후반대의 구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해설자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강철의 속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우완 정통파 투수의 140km/h대 패스트볼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속도에 비해 위력적인 속구를 뿌렸다. 떠오르는 패스트볼이 주무기였다. 낮게 깔려서 오다가 대략 포수 머리 근처 또는 약간 높은 정도의 범위에서 형성되는 직구였는데, 당시에는 이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들어가면 타자는 맞추기도 어려운 마구급 구질이었지만, 반대로 홈런을 맞기도 쉬운 구질이었다. 또한 언더핸드답게 공 끝의 움직임이 상당히 변화무쌍했고, 커브와 슬라이더는 당대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구질들이었다. 특히 이강철의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는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살짝 떠오르면서 우타자 바깥쪽이나 좌타자 몸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가는데, 이강철이 선발로 오래 기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슬라이더가 당시 좌타자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주무기로 많이 이용되는 싱커는 별로 안 던졌는데, 많이 맞아나가서인지 당시 배터리를 이루던 [[장채근]]과의 상의 끝에 봉인했다고 한다.[* 정작 마구마구에서는 싱커의 등급이 높은 편.[[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40613&rankingSectionId=107&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8&oid=456&aid=0000000694|#]]] 사실 이강철의 플레이 스타일이 삼진을 잡는 데 맞춰져 있어 땅볼 유도에 효과를 보이는 싱커를 쓸 필요는 크게 없었다. 그래도 별로 안 던졌다 뿐이지 주력 구종 중 하나였는데, 주로 삼진을 잡기 힘든 선수를 처리하거나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기 위해, 혹은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쓰곤 했다. 싱커 자체도 꽤나 훌륭했던지라 당시에도 최고의 싱커볼 투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여기에 이강철은 완급조절 역시 뛰어나 완급조절에 있어서는 리그에서도 수준급 투수로 정평이 나있었다. 다른 타이거즈 에이스들에 비해 떨어지는 구위를 완급조절을 통해 커버하는 영리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위가 떨어지는 나이에도 선수로 뛰며 롱런할 수 있었다. 언더핸드 투수지만 땅볼을 유도하진 않았고, 슬라이더와 직구의 변화각과 완급 조절을 이용해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이기도 했다. 언더핸드 투수 중 이닝 대비 탈삼진율이 매우 높은 게 그 증거. 그래서 선동열, 정민철, [[주형광]] 같은 괴물 같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리그를 호령하던 1990년대에도 심심찮게 탈삼진 순위에 이름을 올리던 투수였고, 2020년 기준으로도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중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야구)|송진우]]보다 앞서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특기할 점이다.[* 송진우가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뺏긴 했지만 이는 송진우가 이례적으로 롱런했기 때문이다. 둘은 같은 1989년에 데뷔했고, 송진우가 약 5년 더 뛰었다. 이강철이 송진우와 비슷한 커리어를 썼다면 지금까지도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소유자는 이강철이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대표적 홈런 공장장 중 하나가 이강철인데, 통산 218개의 피홈런을 맞아 통산 3위에 올라와 있다. 투고타저 시기에 주로 활동했음에도 홈런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언더핸드는 투구폼 특성상 배팅볼로 던져주는 각도와 비슷한데다 구속도 다른 폼에 비해 불리하다 보니 피홈런에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이강철에 앞선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한희민]] 역시 홈런 공장장이라는 오명이 붙곤 했다.[* 8시즌 동안 104홈런] 그런데 유독 이강철의 피홈런은 임팩트있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편이다. [[김기태(1969)|김기태]]와 [[이승엽]]의 프로 커리어 첫 홈런을 허용했고, 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나서는 [[빵 사건]]이 일어났다. == [[/지도자 경력|지도자 경력]]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강철/지도자 경력)] == 감독 스타일 == 선수들을 믿고 제 기량을 발휘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된다. 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고 팀 내에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한준]]과 [[박경수]]를 존중하며 끈끈한 신뢰 관계를 갖고 있으며, 팀의 최고의 스타라 할 수 있는 [[강백호]]를 비롯한 선수들과 소통을 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021년까지 이강철 체제 3년 동안 투수진 뎁스를 강화시켜 강팀의 기반이 되었다는 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우선 선발진에서는 전임 [[김진욱(1960)|김진욱]] 감독 시절 트레이드로 데려온 [[배제성]]을 가능성을 보며 2019년에 선발수업 시키며 선발 첫 시즌에 10승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배제성은 트레이드 당시 오태곤에 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어느 날 배제성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이강철 감독은 '저렇게 볼을 때릴 줄 아는 선수가 필요하다'며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2020년 신인왕 [[소형준]] 역시 kt의 대표적인 토종 선발로 안착시키고, 2021년에는 군에서 돌아온 [[고영표]]를 리그를 대표하는 사이드 투수로 안착시키는가 하면 [[엄상백]] 역시 상무를 폭격한 이후 돌아와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kt의 토종 선발진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내내 함께한 외국인 투수 듀오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 [[윌리엄 쿠에바스]] 역시 kt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2021년 리그에서 선발 QS 1위를 기록한 원동력이 되었다. 때로는 불펜으로 강등시키겠다거나 기본이 전혀 안 되어있다는 등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면 마음껏 칭찬해주면서 선수단 장악에도 합격점을 받았다.[* 이는 야수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로하스 등 팀의 중심인 선수도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곧바로 대수비로 교체시켜버린 뒤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불펜에서도 이강철 재임 전까지 배팅볼 투수에 머물렀던 [[주권(야구선수)|주권]], 뚜렷한 좌완투수가 부족한 팀에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데려온 [[조현우(야구선수)|조현우]], SK에서 트레이드로 온 베테랑 [[전유수]], 2차 드래프트로 영입한 [[이보근]](2020시즌 한정), [[유원상]](2020시즌 한정),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온 [[박시영]] 등이 모두 이강철 체제에서 준수한 필승조로 (최소 1시즌 이상) 활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수진에서는 [[배정대]], [[김민혁(1995)|김민혁]], [[조용호(야구선수)|조용호]] 등을 2019년에 발굴하여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했지만, 2021년에는 이들의 10월의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부침을 겪음에도 신진 자원이 등장하지 않아 야수진 육성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배정대, 조용호가 부진한 와중에 김민혁이 타격감이 좋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격감 좋은 김민혁을 천대하고 타격감 안 좋은 조용호를 주구장창 기용하다 날려먹은 경기들도 있었을 정도로 쓸놈쓸 운영만 하고, 2군에서 새로운 자원을 써볼 생각을 안해 상당한 비판을 겪고 있다.[* 단 김민혁은 부상상태였음을 감안해야한다.] 다만 김민혁의 경우는 타격 능력은 있어도 수비가 불안한 점으로 인해 수비를 중시하는 감독 특성상 조용호를 안쓰고 싶어도 쓸 수 밖에 없던 점도 있다. 내야진에서는 더 암담하다. [[강백호]]는 1루로 고정은 시켰지만 수비가 불안하고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심우준]] 역시 점차 나아지는 모습이지만 타격 부분에선 여전히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특히나 아직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의 군입대에 대비해 1군에 부른 [[권동진(야구선수)|권동진]]도 주루나 수비에서 자잘자잘한 실수가 계속해서 쌓이며 아직까지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박경수]]는 노쇠화를 겪으며 2021시즌 기점으로 극심한 타격침체를 겪고있으며 은퇴가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2루수 [[신본기]]와 [[오윤석]]은 어디까지나 주전으로서 도약이 아닌 백업에 머물러 있다.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는 3루수 [[황재균]]을 대체할 만한 선수도 딱히 없는 것이 문제. 그나마 시즌 초반 [[김병희]]가 좋은 타격으로 인상을 남겼지만, 부상 이후 계속되는 잦은 부상으로 감을 잃으며 다시 시즌 초의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힌, 내야진의 뎁스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강백호]]가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으로 병역 혜택을 받는다 해도, 병역 문제, 노쇠화 및 잦은 부상, 금강불괴를 자랑하지만 35세에 접어들어 노쇠화가 우려되는 등, 주전들의 공백을 백업선수들이 메꿀 수 있는지의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포수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장성우]]를 뒷받침할 만한 젊은 포수 역시 없다. 그나마 2021년 [[허도환]]이 개인 커리어하이를 보냈으나, 그 역시 부상으로 빠진 이후에 뒷받침할 만한 좋은 포수는 없었다. [[김준태(야구선수)|김준태]]는 백업으로도 안어울리며, 입단 4년차 [[조대현(야구선수)|조대현]]은 1군 등록은 했지만 1군 경기 출전은 1경기도 없었다. 일단 2021년에 팀이 1위 순위싸움을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적극적인 기용을 잘 안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야수진이 10월에 집단부진을 겪으며 아무런 조치도 안한 것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타이브레이커와 한국시리즈 모두 잡아내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룬 명장임은 분명하다.[* 당장에 신생팀이었던 KT의 첫 5할 승률과 가을야구 진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것에 있어서 이강철의 지도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견이 없다.] 2022년에는 무엇보다 야수진에서 준수한 신진자원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 기타 == * 2013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KIA의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분류되었다. [[염경엽]] 감독 옆에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는 이강철이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김평호]] KIA 코치도 팬들과 소통을 잘하고 평가도 괜찮아 감독 후보로 거론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투수 출신인 이강철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 2013년 열린 제2회 한일 올드스타 슈퍼게임 9회초에 등판하여 평균 100km/h의 공으로 일본측의 올드스타을 상대로 우세를 보였다. * [[장채근]]은 이강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강철이는 내 피부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상의를 탈의하고 있으면 내 곁으로 와선 '형, 피부가 너무 뽀얗고 부드럽다'며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곤 했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물론 강철이가 성적 취향이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다. 강철이는 분명한 사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10&aid=0000044591|#]] [[파일:/image/410/2012/12/08/20121206_1354784088.jpg_59_20121208092402.jpg]] 1990년대 초 [[무등산]]에서 해태 선수들과의 야유회에서 [[장채근]]과 찍은 사진. * 선동열도 이강철이 자기 피부가 부드럽다고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며 비슷한 회고를 한 것을 보면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던 듯(...) * 뛰어난 성적과 더불어 곱상하고 여린 외모로 여성팬들을 몰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선동열의 증언으로는 젊은 시절 옷 좀 차려입으면 제비가 따로 없게 잘생겨서 여자 관계가 매우 복잡했고, 어느 날 야구에 집중하겠다고 여자 관계를 싹 정리했더니 그 여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룸메이트 시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50대인 현재도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편. 자기 관리도 잘 해서 배도 거의 안 나왔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젊었을 때 하얀 피부의 곱상한 외모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많이 안타까워 한다. 특히 감독이 된 후엔 스트레스로 트러블이 생긴 건지 매우 안 좋아졌다. * 그가 코칭을 해준 사이드암 투수들이 그가 팀을 떠난 후 불을 지르는 경향이 있어 사이드암 코칭에만 특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으로 KIA의 0점대 마무리였던 [[유동훈]]과 넥센의 2016시즌 신인왕 [[신재영]]. [[박치국]]도 부진하다가 다시 부활하기까지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 [[KIA 타이거즈]]의 [[맷 윌리엄스]] 감독이 KBO팀 감독들에게 인사차 선물로 와인을 주자 빈손으로 받기 그렇다고 답례품으로 연고지 수원의 명물인 [[소갈비|왕갈비]]를 답례품으로 선물해 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다른 감독들이 답례품으로 어떤것을 주게 되는지 소소한 관심을 끌었다. * 현역 시절에 달았던 '''19번'''은 그의 은퇴 이후 이강철이 키워낸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가장 달고 싶어하는 번호가 되었다. [[신용운]]과 [[손영민]]이 이 배번을 달았었다. 그러나 [[손영민]]이 임탈되고, 이강철이 넥센으로 가면서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이 아닌 뜬금없는 좌완 [[손동욱]]이 달더니 이젠 노장 우완 [[최영필]]이 달았다가, [[최영필]]의 은퇴 다음엔 2015년 1차지명 투수 [[이민우(야구선수)|이민우]]가 달았다. 이후 2018 시즌이 되어 투수인 [[손영민]]이 다시 19번을 가져가면서 원래대로 사이드암 투수가 달게되었다. 한편 넥센에서도 [[한현희]]가 이 번호를 달았지만 [[송신영]]이 돌아오면서 한현희는 원래 달던 63번을 달게 되었다. 다만 2020시즌 [[KIA 타이거즈]]에서는 투수가 아니라 내야수인 [[김태진(1995)|김태진]]이 달고 있는데, 이는 트레이드로 워낙 급하게 기아로 온 지라 번호를 고를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드 이전 이 번호를 단 [[박정수(야구선수)|박정수]]는 사이드암 투수가 맞다.] 2021년 현재는 김태진이 등번호를 5번으로 바꾼 후 사이드암인 [[윤중현]]이 달고 있다. * [[이승엽]]의 첫 홈런을 만든 장본인이자 레전드로 가게끔 만든 장본인이다.[* 2000 시즌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장채근]]이 체조 선수처럼 몸이 유연했던 투수 3명 중 한 명으로 뽑았다. 나머지 2명은 선동열과 김정수다. 제자들에게 유연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군기 반장으로 팀 내 기강을 잡을 때 기량이 좋은 선수를 대표로 혼내야 효과가 좋았다고 늘 타깃으로 삼았던 선수가 이강철이었다고 밝혔다. * [[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선동열]] 이후 2번째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감독이자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됐다. 역대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이강철 외에 [[서정환]], [[김성한]], [[유승안]],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등이 있으나 선동열을 빼고는 대부분 감독으로서 실패한 이들로 꼽힌다.[* 이강철과 선동열 외에 그나마 가을야구를 경험한 해태 출신 감독은 서정환과 김성한 뿐이다. 서정환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이던 1998년과 1999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전자 라이벌 [[LG 트윈스]], 영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에 제압당하는 바람에 경질됐고 김성한도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이던 2002년과 2003년 연달아 플레이오프로 팀을 이끌었으나 각각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에게 패하면서 미끄러졌다.] * KBO 리그 선수 출신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중 유일하게 현역 시절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출신이다. MVP 수상 이후인 1996년 11월에 축하 기념으로 [[KBS]] 예능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도 출연했다. == 연도별 주요 성적 == * '''{{{#red,#ff0000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17> {{{#ffffff 역대 기록}}} || || {{{#ffff00 연도}}} || {{{#ffff00 소속팀}}} || {{{#ffff00 경기수}}} || {{{#ffff00 이닝}}} || {{{#ffff00 승}}} || {{{#ffff00 패}}} || {{{#ffff00 세}}} || {{{#ffff00 홀}}} || {{{#ffff00 승률}}} || {{{#ffff00 ERA}}} || {{{#ffff00 피안타}}} || {{{#ffff00 피홈런}}} || {{{#ffff00 4사구}}} || {{{#ffff00 탈삼진}}} || {{{#ffff00 실점}}} || {{{#ffff00 자책점}}} || {{{#ffff00 WHIP}}} || || 1989 ||<|11> [[해태 타이거즈|해태]] || 36 || 195⅓ || 15 || 8 || 5 || - || .652 || 3.23 || 153 || 13 || '''85'''[br](5위) || '''138'''[br](4위) || 74 || 70 || 1.17 || || 1990 || '''44'''[br](3위) || '''{{{#red,#ff0000 220⅔}}}'''[br](1위) || '''16'''[br](3위) || 10 || 5 || - || .615 || 3.14 || '''163'''[br](3위) || '''{{{#red,#ff0000 24}}}'''[br](1위) || '''93'''[br](3위) || '''165'''[br](2위) || '''84'''[br](3위) || '''{{{#red,#ff0000 77}}}'''[br](1위) || 1.12 || || 1991 || 36 || '''214⅔'''[br](2위) || '''15'''[br](5위) || 11 || 3 || - || .577 || 3.19 || 158 || '''{{{#red,#ff0000 29}}}'''[br](공동 1위) || 69 || '''193'''[br](2위) || '''87'''[br](3위) || '''76'''[br](3위) || '''0.99'''[br](3위) || || 1992 || 33 || '''217⅓'''[br](2위) || '''18'''[br](2위) || 9 || 0 || - || .667 || 3.44 || '''179'''[br](4위) || '''{{{#red,#ff0000 29}}}'''[br](1위) || '''87'''[br](5위) || '''{{{#red,#ff0000 156}}}'''[br](1위) || '''88'''[br](4위) || '''83'''[br](2위) || '''1.15'''[br](5위) || || 1993 || 31 || 154 || 10 || 10 || 1 || - || .500 || 3.04 || 113 || 9 || '''78'''[br](5위) || '''131'''[br](4위) || 60 || 52 || 1.16 || || 1994 || 33 || 185⅔ || 12 || 15 || 1 || - || .444 || 3.64 || 150 || 19 || '''{{{#red,#ff0000 122}}}'''[br](1위) || '''140'''[br](5위) || '''86'''[br](2위) || '''75'''[br](5위) || 1.37 || || 1995 || 29 || 150 || 10 || 10 || 1 || - || .500 || 3.24 || 127 || 15 || 71 || 126 || 60 || 54 || 1.20 || || 1996 || 28 || 153⅔ || 10 || 9 || 1 || - || .526 || 2.46 || 114 || 11 || 60 || 119 || 43 || 42 || '''1.05'''[br](5위) || || 1997 || 30 || 162⅔ || 11 || 3 || 2 || - || '''.786'''[br](2위) || 2.99 || 130 || 14 || 75 || 128 || 63 || 54 || 1.17 || || 1998 || 31 || '''179⅓'''[br](5위) || '''15'''[br](3위) || 11 || 0 || - || .577 || 3.11 || 165 || 18 || 65 || '''160'''[br](4위) || 70 || 62 || 1.18 || || 1999 ||<-15> 1군 기록 없음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2000 || [[삼성 라이온즈|삼성]] || 14 || 37 || 1 || 4 || 0 || 0 || .200 || 7.30 || 45 || 8 || 22 || 20 || 33 || 30 || 1.68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2001 ||<|5> [[KIA 타이거즈|KIA]] || 27 || 56 || 2 || 3 || 1 || 1 || .400 || 6.91 || 59 || 9 || 31 || 50 || 43 || 43 || 1.41 || || 2002 || 66 || 105 || 5 || 2 || '''17'''[br](5위) || 8 || .714 || 3.17 || 82 || 12 || 46 || 97 || 41 || 37 || 1.12 || || 2003 || 67 || 68⅓ || 6 || 4 || 9 || '''14'''[br](3위) || .600 || 1.98 || 42 || 7 || 31 || 57 || 21 || 15 || 0.95 || || 2004 || '''79'''[br](3위) || 85⅓ || 6 || 2 || 7 || 7 || .750 || 2.95 || 68 || 9 || 39 || 56 || 29 || 28 || 1.16 || || 2005 || 18 || 19⅔ || 0 || 1 || 0 || 3 || .000 || 3.20 || 23 || 1 || 12 || 15 || 7 || 7 || 1.58 || ||<-2> '''[[KBO 리그]] 통산'''[br](17시즌) || 602 || '''2204⅔'''[br](3위) || '''152'''[br](3위) || 112 || 53 || 33 || 0.576 || 3.29 || 1771 || '''218'''[br](3위) || '''986'''[br](2위) || '''1751'''[br](2위) || 889 || 805 || 1.17 || ||<-3> {{{#ffffff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 1989년 || 8완투 || 3완봉 || || 1990년 || '''{{{#red,#ff0000 10완투}}}'''[br](공동 1위) || 1완봉 || || 1991년 || '''11완투'''[br](공동 4위) || '''2완봉'''[br](공동 4위) || || 1992년 || '''12완투'''[br](4위) || '''2완봉'''[br](공동 4위) || || 1993년 || 2완투 || 1완봉 || || 1994년 || 5완투 || 1완봉 || || 1995년 || 4완투 || 2완봉 || || 1996년 || 5완투 || 2완봉 || || 1997년 || 5완투 || 2완봉 || || 1998년 || 3완투 || 2완봉 || || '''[[KBO 리그]] 통산''' || 65완투 || '''18완봉'''[br](5위) || == 지도자 시절 == ||<-9> {{{#ffffff 역대 감독 전적}}}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승 }}}''' || '''{{{#ffffff 패}}}''' || '''{{{#ffffff 무}}}''' || '''{{{#ffffff 승률}}}''' || '''{{{#ffffff 정규리그}}}''' || '''{{{#ffffff 포스트시즌}}}''' || ||2019||<|3> '''[[kt wiz]]''' || 144 || 71 || 71 || 2 || .500 || 6위 || - || ||2020|| 144 || 81 || 62 || 1 || .566 || 2위 || 플레이오프 패배 (상대: [[두산 베어스]]) || ||2021|| 144 || 76 || 59 || 9 || .563 || '''1위'''[* 타이브레이커 승리를 통한 정규시즌 우승] || '''한국시리즈 우승''' (상대: [[두산 베어스]]) ||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1966년 출생]][[분류:1989년 데뷔]][[분류:2006년 은퇴]][[분류:북구(광주) 출신 인물]][[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분류:동국대학교 출신]][[분류:우완 투수]][[분류:우언우타]][[분류:해태-KIA 타이거즈/은퇴, 이적]][[분류:삼성 라이온즈/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kt wiz/역대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KBO 한국시리즈 MVP]]보낼 RAW[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정치인, rd1=이강철(정치인))] [include(틀:kt wiz/간략(코칭스태프))] ---- || '''{{{#ffffff 이강철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KIA 타이거즈 1차 지명선수)] ---- [include(틀:KBO 리그 감독)] ---- || '''{{{#ffffff 이강철의 감독직 / 기타 직책 역임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kt wiz 감독)] ---- [include(틀:두산 베어스 2군 감독)] ---- [include(틀:KIA 타이거즈 주장)] }}} || ---- || '''{{{#ffffff 이강철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파일:A4etEfi.png|width=50]][[파일:wuokE4a.png|width=50]][[파일:Ii0lZeU.png|width=50]][[파일:PccoW9i.png|width=50]][[파일:XmLbTVV.png|width=5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 '''[[1989년 한국시리즈|{{{#ffffff 1989}}}]]''' || '''[[1991년 한국시리즈|{{{#ffffff 1991}}}]]''' || '''[[1993년 한국시리즈|{{{#ffffff 1993}}}]]''' || '''[[1996년 한국시리즈|{{{#ffffff 1996}}}]]''' || '''[[1997년 한국시리즈|{{{#ffffff 1997}}}]]''' || ---- || [[파일:external/oi63.tinypic.com/244s6lk.png|width=7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 || '''[[2009년 한국시리즈|{{{#ffffff 2009}}}]]''' || ---- || [[파일:2021시즌 kt wiz 한국시리즈 챔피언 우승 엠블럼.png|width=auto&height=70]][br]'''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 || '''[[2021년 한국시리즈|{{{#ffffff 2021}}}]]''' || ---- ||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width=auto&height=70]][br]'''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d4af37 금메달(코치)}}}''' || || '''[[선동열호/2018년|{{{#FFFFFF 2018}}}]]''' || ---- || [[KBO 리그|[[파일:KBO 리그 아이콘.svg|width=25]]]] '''{{{#ffffff [[1996년 한국시리즈|{{{#fae7a6 KBO 한국시리즈}}}]]}}}''' [br] '''{{{#ffffff 1996 한국시리즈 MVP}}}''' || ---- ||<-2> {{{#ffffff 보유 기록}}} || || 10년 연속 10승 || 1989년~1998년 || || 10년 연속 100탈삼진 || 1989년~1998년[* [[장원준]]과 타이기록] || ---- ||<-5> '''{{{#ffffff [[해태 타이거즈|{{{#ffffff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김만후[br](1987~1988) || {{{+1 →}}} || '''{{{#ff0000 이강철[br](1989~1999)}}}''' || {{{+1 →}}} || [[박충식]][br](2000~2001) || ||<-5> '''{{{#ffffff [[삼성 라이온즈|{{{#ffffff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 || 이복연[br](1998) || {{{+1 →}}} || '''{{{#074ca1 이강철[br](2000~2001)}}}''' || {{{+1 →}}} || 이준호[br](2002) || ||<-5> '''{{{#fff [[KIA 타이거즈|{{{#fff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 || [[성영재]][br](2000) || {{{+1 →}}} || '''{{{#f01e23 이강철[br](2001)}}}''' || {{{+1 →}}} || 홍찬영 || ||<-5> '''{{{#fff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 || [[박충식]][br](2000~2001) || {{{+1 →}}} || '''{{{#f01e23 이강철[br](2002~2005)}}}''' || {{{+1 →}}} || [[신용운]][br](2006~2007) || ||<-5> '''{{{#fff [[KIA 타이거즈|{{{#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72번}}}''' || || 박창영[br](1995) || {{{+1 →}}} || '''{{{#f01e23 이강철[br](2006~2007)}}}''' || {{{+1 →}}} || [[장재중]][br](2008~2011) || ||<-5> '''{{{#FFFFFF [[KIA 타이거즈|{{{#FFFFFF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 || [[김태룡(1968)|김태룡]][br](2004~2007) || {{{+1 →}}} || '''{{{#FFFFFF 이강철[br](2008~2012)}}}''' || {{{+1 →}}} ||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br](2013~2014) || ||<-5> '''{{{#fff [[키움 히어로즈|{{{#fff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9번}}}''' || || || {{{+1 →}}} || '''{{{#ffffff 이강철[br](2013~2016)}}}''' || {{{+1 →}}} || [[박도현(야구)|박도현]][br](2017~) || ||<-5> '''{{{#fff [[두산 베어스|{{{#ffffff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 || [[문동환]][br](2013~2016) || {{{+1 →}}} || '''{{{#ffffff 이강철[br](2017~2018)}}}''' || {{{+1 →}}} || [[이도형]][br](2019~) || ||<-5> '''{{{#fff [[kt wiz|{{{#ffffff kt wiz}}}]] 등번호 71번}}}''' || || [[이숭용]][br](2014~2018) || {{{+1 →}}} || '''{{{#ffffff 이강철[br](2019~)}}}''' || {{{+1 →}}} || 현역 ||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t wiz 이강철 감독 프로필.jpg|width=100%]]}}} || ||<-2> {{{#ffffff '''kt wiz No.71 [[감독#s-1.1|{{{#!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fff; font-size: .8em" {{{#000000 '''★'''}}}}}}]]'''}}} || ||<-2> '''{{{+2 이강철}}} [br] 李强喆 / Lee Kang-Chul''' || || '''생년월일''' ||[[1966년]] [[7월 12일]][* [[음력]] [[5월 24일]].] ([age(1966-07-12)]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출신지''' ||[[파일:광주광역시 휘장.svg|width=25]] [[광주광역시]] [[파일:북구(광주광역시) CI.svg|width=25]] [[북구(광주)|북구]] || || '''학력''' ||서림초 - [[무등중학교|무등중]] - [[파일:FzeX4gI.png|width=25]]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제일고]] - [[파일:동국대학교 심벌마크.svg|width=25]] [[동국대학교 야구부|동국대]] || || '''신체''' ||180cm, 78kg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언우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1989년/신인드래프트|1989년 1차 지명 (해태)]] || || '''소속팀'''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width=25]]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width=25]] [[해태 타이거즈]] (1989~1999)'''[br][[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1995~2007).svg|width=25]] [[삼성 라이온즈]] (2000~2001)[br][[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width=25]] '''[[KIA 타이거즈]] (2001~2005)''' || || '''지도자'''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width=25]]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6~2007)[br][[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width=25]]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10~2016).svg|width=25]]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7~2012) [br] [[파일:넥센 히어로즈 엠블럼.svg|width=25]]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2013~2016) [br]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width=25]]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7[* 4월 18일까지.]) [br]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width=25]]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7[* 4월 18일부터 시즌 종료시까지.]) [br][[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width=25]] [[두산 베어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8) [br] [[파일:kt wiz 엠블럼.svg|width=25]] '''[[kt wiz]] 감독 (2019~)''' ----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width=2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17~2018) || || '''종교'''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서울 강남구 역삼2동에 위치한 [[청운교회]]의 집사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igers_new&no=9389220&page=1|#]]]||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강철 200승.jpg|width=100%]]}}}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출신 [[코치(스포츠)|감독]]. 은퇴 후 코치 생활을 거쳐 [[2019년]]부터 [[kt wiz]]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의 투수. 별명으로는 잘할 때는 아이언맨, 철동님, 킹갓철, 깡동님 등이 있고, 못할 때 한정으로 강Fe, 깡통님, 강페이, 실험좌, 20억, [[세이콘 드립|쇠이콘]]이 있다. ==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820000026396.jpg|width=100%]]}}} || 1989년, 해태에 입단한 국가대표 투수 3인방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조계현]]과 [[이광우]]. 3,500만원을 받고 입단했으나,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송진우(야구)|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4,200만원)을 받자 해태는 기를 세워준답시고 송진우와 같은 금액인 4,200만원으로 부풀려 발표했다. 막 입단한 선수의 기를 살려준다고 계약금을 부풀려 발표한 걸 보면 해태가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이강철은 1989년 데뷔시즌부터 15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통산 5번째 우승[* 과거의 전후기 시즌제가 단일 시즌제로 바뀌고 치른 첫 한국시리즈였는데, 해태는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서 1위 빙그레를 한국시리즈에서 누르고 우승했다. 그러나 다음 2위 우승은 무려 29년 뒤인 2018년 [[SK 와이번스]]가 달성하게 된다. 그 외에 1992년(롯데), 2001년(두산), 2015년(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들(양대리그였던 1999~2000년 시즌은 제외)은 정규시즌 1위팀이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했다.]에 기여했으며,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인 1998년까지 매년 150~200이닝을 기록하면서도 평균자책점은 최대 3.64만 기록할 정도로 기복없는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해태 왕조의 9번째 우승까지 큰 공헌을 했다. 또한 평균 자책점 2점대도 2번이나 기록했고 15승 이상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화려함도 갖추었던 선수였다. 이강철하면 떠오르는 '''10년 연속 10승 100탈삼진'''[* 장원준도 10년연속 100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강철은 최소 119개였던 반면 장원준은 102, 103, 107, 108개 등 조금 아슬아슬하기도 하였고 최다삼진도 이강철이 크게 앞선다.]의 기록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다. 선발투수 10승 하면 타자 3할과 비슷한 대단한 기록이었지만 이강철이 딱 10승하면 겨우10승? 정도로 너무 당연한 기록이었던 것. 또한 1996년의 경우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1완봉 평균자책점 0.56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고, 부상으로 [[현대정공]]에서 출시한 [[현대 싼타모]]를 받았다. 1998년에는 투수임에도 이례적으로 팀 주장을 맡아 고참으로서 선수단을 이끌기도 하였다. [youtube(6tiR9XNQe9E)]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527220238468B3.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815231402355B3.jpg|width=100%]]}}} || 1998 시즌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1999 시즌을 통째로 쉰 후,[* 당시 이강철의 이탈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나마 [[곽현희]]가 팀내 최다승인 11승을 거뒀지만 방어율이 무려 '''6점대'''였다. 나머지 투수들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엄청난 타고 시즌이지만 타선이 210홈런을 치면서 역대 최강에 근접하는 포스를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이강철의 부재가 너무나 뼈 아팠다. 특히 이강철의 이탈이 팀에 큰 구멍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는데, 2년간 WAR 13에 20승 60세이브를 거두었던 [[임창용]]이 9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선발진의 무게감을 양분하던 [[이대진]]도 이 해에 어깨 부상으로 인한 재활의 터널에 들어갔다. 거기에 어린나이에도 선발로테이션을 훌륭히 책임지던 [[김상진(1977)|김상진]]은 위암으로 인해 22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했다. 즉 1998년 팀의 핵심투수 4명이 이듬 해 이대진의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전부 이탈해버린 것이다.] 2000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3년 간 8억 원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맺고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 당시 FA 보상선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박충식]]이었다. [[박충식]]은 고향 팀 해태로 이적한 후 해태의 열악한 재활 시스템에 기겁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해태 타이거즈]]와 [[박충식]] 항목 참조.] 그러나 무릎 수술 후유증과 노쇠화가 겹쳐 2000시즌은 평균자책점 7.30 1승 4패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해오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결국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1년 7월 30일 2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돌아갔다.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이후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자책점 2.79 17승 29홀드 33세이브 WAR 7.08'''을 기록하며 계투로나마 부활을 알렸고, 특히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각각 '''66경기 105이닝, 67경기 68이닝, 79경기 85이닝'''을 소화하며[* 이때 그는 역대 만 36~38세 선수 중 최다 등판을 기록하기도 했다.당시 계투가 엄청나게 불안했던 KIA에서 팬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안심하고 볼 수 있었던 중간계투는 이강철과 [[신용운]] 뿐이었다.] 롱릴리프, 셋업맨,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2004년 말부터 다가온 노쇠화와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5 시즌 종료 후 2006년 4월 11일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https://blog.naver.com/hisjini/50051431953|은퇴식 당시 사진 모음]], [[https://www.youtube.com/watch?v=gVejemt3WcA|은퇴식 영상]] 그러나 동시대에 해태에서 함께 뛰었던 선배 '''[[선동열]]''', 동기생 [[조계현]], 그리고 후배 [[이대진]]과 [[임창용]] 등이 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2인자로 인식되었다.[* 해태의 모든 투수들은 좋든싫든 선동열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선동열과 동급으로 꾸준하게 활약했다고 할 만한 투수는 전성기의 최동원, 김시진, 최근의 류현진 정도이다.][* 심지어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팀의 우승, 프로 선수로서 본인의 유일한 공식 수상이었던 한국시리즈 MVP 획득에도 불구하고, 4차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현대 정명원이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웃지못할 일마저 벌어졌다.] 어떻게 보면 이강철은 단순한 기록의 비교 뿐 아니라 선동열을 중심으로 했던 80년대 말~90년대 초반 해태의 마운드 운영으로 손해를 본 셈이라고할 수도 있었다. 기껏 선발로 나와 잘 던지다가 5회 아웃카운트 1~2개만 남기고서 흔들린다 싶으면 바로 선동열로 교체해 승수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얻은 승수는 많았지만[* 특히 1992년 다승 2위였던 18승 중 17개가 선발승이었는데 이 것은 역대 잠수함 투수 최다 선발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을 제외하면 큰 경기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있으며,[* 통산 포스트시즌 방어율이 4.12로 나쁘지 않지만 93년(평균자책점 7.71)과 97년 한국시리즈(1회 5실점 강판)에서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크고, 더욱이 말년 마지막 포스트시즌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안경현]]과 [[홍성흔]]에게 2방이나 얻어맞은 모습 때문에 더욱 그렇게 비추어졌다. 그에 비해 선동열이 포스트시즌에서 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약했던 모습도 평균자책점 2.24(한국시리즈 한정 1.74)였으며 [[문희수]]나 [[김정수(1962)|김정수]]같이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난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들이 많아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작 시즌 최다승을 기록한 1992년과 [[이종범]]의 일본진출과 모기업의 몰락으로 해태가 망하기 시작한 1998년을 제외하면 그가 팀내 최다승을 거두지 못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점이 떨어졌던 것도 있다. 또한 선동열이나 조계현, 이대진보다 비교적 피홈런도 많았던 선수였기 때문에[* 통산 피홈런이 조계현의 2배 가까이 된다.] 더욱 선입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이강철이 선수 시절에 거둔 기록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5회에 [[1996년 한국시리즈]] MVP 경력과[* 다만 이 부분은 해태 시절 선배였던 [[김정수(1962)|김정수]]가 앞서는데, 우승 8회에 1986년 KS MVP 그리고 통산 한국시리즈 최다승 경력이 있다.] 위의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릿수 승과 3자릿수 탈삼진'''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기록. 10년 연속 3자릿수 탈삼진만 해도 역시 굉장한 기록인데 2017년 [[장원준]]이 타이를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우위가 갈리는 시즌이 뚜렷한데,(1989~92는 이강철 우세, 1993~96은 조계현 우세, 이후 다시 이강철 우세) 이강철은 탈삼진에서만큼은 조계현한테 한번도 밀리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2018년 기준, '''통산다승 3위, 통산이닝 3위, 통산 삼진 2위, 통산WAR 6위, 통산완투 6위, 통산완봉 5위,''' 등, 양적 통산성적에 관련해서는 KBO리그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대선수임에 분명하다. 선동열을 제외하더라도, 90년대 타이거즈를 함께 지탱했던 조계현의 1993~96년과 이대진의 짧고 강했던 전성기인 1995~98년이 워낙 좋았던 점도 있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에는 팀내 최고 에이스 자리를 맡았지만 데뷔시즌부터 4년 평균 200이닝이 넘는 혹사를 당한 여파인지 1993~96년에는 조계현에게 확실히 밀렸고, 그때 조계현은 4년간 60승을 거두며 해태의 에이스자리를 꿰찼으며, 조계현의 경우는 당시 2년간 왕좌를 양분하였던 [[LG 트윈스]]에게 12연승을 거두며 절대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탓도 있다. 거기에 1995년부터 기량이 만개해 4년간 평균 2점대 방어율에 59승을 쌓으며 탈삼진 1위를 2번이나 석권한 [[이대진]]의 활약이 너무나도 커[* 1998년의 10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사실상 1997년,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1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의 에이스 호칭은 이대진에게 내주는 등 2인자 이미지가 굳어진다.[* 사실 이대진과의 공헌도 차이는 두 해 다 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팀의 에이스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또한 이대진 뿐 아니라 1997,98년의 타이거즈 투수진 운용의 핵심키를 가진 투수는 임창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임창용은 '''2년간 123경기에서 268이닝 평균자책점 2.11 22승 60세이브 261삼진 WAR 13.29''' 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투수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승과 150이닝, 100삼진을 꾸준히 챙기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90년대 타이거즈 왕조에 큰 역할을 했던 스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90년대에 이강철은 프로 입단 동기인 [[송진우(야구)|송진우]]와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입단 당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고 이강철도 같은 금액으로 부풀려 발표했었고,[* 실제로는 이강철이 적음] 1992년에는 [[송진우(야구)|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했는데, [[김영덕]] 감독의 노골적인 다승왕 만들어주기를 등에 업은 [[송진우(야구)|송진우]]에게 아쉽게 패한다.[* 1992년 빙그레와 해태는 시즌 마지막 2연전에서 대결했는데, 첫 경기에서 [[장종훈]]의 시즌 40홈런 달성 등으로 빙그레가 여유있게 앞서자 김영덕 감독은 잘 던지던 선발 [[한희민]]을 5회부터 송진우로 교체해 당시 이강철과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였던 송진우에게 1승을 선사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직접적 경쟁 당사자의 팀을 상대로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시도하니,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다.][* 이강철은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서 '공동' 다승 1위의 가능성에 도전했지만, 장종훈의 시즌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본인이 회상하길 처음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아깝다고 얘기를 하니 허탈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고.[* 하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송진우(야구)|송진우]]를 선배로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한다. 당사자인 [[송진우(야구)|송진우]]는 "내가 아는 강철이는 그런 말 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출처 - 1992년 10월 7일 주간야구)] 그 해에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92년 당시에는 탈삼진 타이틀이 없어서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해인 1993년에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되었다.]또 12년 뒤 [[선동열]]의 통산 최다 탈삼진을 경신했지만 그마저도 [[송진우(야구)|송진우]]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송진우 뿐 아니라 주로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꾸준하게 선발로테이션을 지켰던 [[정민철]]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누적 스탯은 정민철이(sWAR 정민철 60.02 이강철 50.75), 비율 스탯은 이강철이(스탯티즈 기준 ERA+ 정민철 117.9 이강철 123.8) 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둘은 같은 16시즌을 뛰었다.] 그러나 다른 누적스탯인 탈삼진에선 이강철이 (1749 vs 1661), 비율스탯인 FIP+에서는 정민철이(스탯티즈 기준 정민철 116.3 이강철 109.2)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전반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비슷해 보이지만 WAR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정민철의 근소 우위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이버 스탯으로 가지 않아도 정민철은 90년대 당시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에 해외진출까지 성공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플레이 스타일 == [[파일:attachment/이강철/52e8ec121dc1d32f54fb.gif|width=400]] [[선동열]]의 별명이 무등산 폭격기였다면, 이강철의 별명은 "무등산 핵잠수함"이었다.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스로|언더핸드]] 투수로 유명했다. 전성기 시절 빠르지 않은 130 중후반대의 구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해설자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강철의 속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우완 정통파 투수의 140km/h대 패스트볼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속도에 비해 위력적인 속구를 뿌렸다. 떠오르는 패스트볼이 주무기였다. 낮게 깔려서 오다가 대략 포수 머리 근처 또는 약간 높은 정도의 범위에서 형성되는 직구였는데, 당시에는 이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들어가면 타자는 맞추기도 어려운 마구급 구질이었지만, 반대로 홈런을 맞기도 쉬운 구질이었다. 또한 언더핸드답게 공 끝의 움직임이 상당히 변화무쌍했고, 커브와 슬라이더는 당대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구질들이었다. 특히 이강철의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는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살짝 떠오르면서 우타자 바깥쪽이나 좌타자 몸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가는데, 이강철이 선발로 오래 기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슬라이더가 당시 좌타자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주무기로 많이 이용되는 싱커는 별로 안 던졌는데, 많이 맞아나가서인지 당시 배터리를 이루던 [[장채근]]과의 상의 끝에 봉인했다고 한다.[* 정작 마구마구에서는 싱커의 등급이 높은 편.[[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40613&rankingSectionId=107&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8&oid=456&aid=0000000694|#]]] 사실 이강철의 플레이 스타일이 삼진을 잡는 데 맞춰져 있어 땅볼 유도에 효과를 보이는 싱커를 쓸 필요는 크게 없었다. 그래도 별로 안 던졌다 뿐이지 주력 구종 중 하나였는데, 주로 삼진을 잡기 힘든 선수를 처리하거나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기 위해, 혹은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쓰곤 했다. 싱커 자체도 꽤나 훌륭했던지라 당시에도 최고의 싱커볼 투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여기에 이강철은 완급조절 역시 뛰어나 완급조절에 있어서는 리그에서도 수준급 투수로 정평이 나있었다. 다른 타이거즈 에이스들에 비해 떨어지는 구위를 완급조절을 통해 커버하는 영리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위가 떨어지는 나이에도 선수로 뛰며 롱런할 수 있었다. 언더핸드 투수지만 땅볼을 유도하진 않았고, 슬라이더와 직구의 변화각과 완급 조절을 이용해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이기도 했다. 언더핸드 투수 중 이닝 대비 탈삼진율이 매우 높은 게 그 증거. 그래서 선동열, 정민철, [[주형광]] 같은 괴물 같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리그를 호령하던 1990년대에도 심심찮게 탈삼진 순위에 이름을 올리던 투수였고, 2020년 기준으로도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중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야구)|송진우]]보다 앞서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특기할 점이다.[* 송진우가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뺏긴 했지만 이는 송진우가 이례적으로 롱런했기 때문이다. 둘은 같은 1989년에 데뷔했고, 송진우가 약 5년 더 뛰었다. 이강철이 송진우와 비슷한 커리어를 썼다면 지금까지도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소유자는 이강철이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대표적 홈런 공장장 중 하나가 이강철인데, 통산 218개의 피홈런을 맞아 통산 3위에 올라와 있다. 투고타저 시기에 주로 활동했음에도 홈런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언더핸드는 투구폼 특성상 배팅볼로 던져주는 각도와 비슷한데다 구속도 다른 폼에 비해 불리하다 보니 피홈런에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이강철에 앞선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한희민]] 역시 홈런 공장장이라는 오명이 붙곤 했다.[* 8시즌 동안 104홈런] 그런데 유독 이강철의 피홈런은 임팩트있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편이다. [[김기태(1969)|김기태]]와 [[이승엽]]의 프로 커리어 첫 홈런을 허용했고, 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나서는 [[빵 사건]]이 일어났다. == [[/지도자 경력|지도자 경력]]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강철/지도자 경력)] == 감독 스타일 == 선수들을 믿고 제 기량을 발휘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된다. 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고 팀 내에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한준]]과 [[박경수]]를 존중하며 끈끈한 신뢰 관계를 갖고 있으며, 팀의 최고의 스타라 할 수 있는 [[강백호]]를 비롯한 선수들과 소통을 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021년까지 이강철 체제 3년 동안 투수진 뎁스를 강화시켜 강팀의 기반이 되었다는 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우선 선발진에서는 전임 [[김진욱(1960)|김진욱]] 감독 시절 트레이드로 데려온 [[배제성]]을 가능성을 보며 2019년에 선발수업 시키며 선발 첫 시즌에 10승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배제성은 트레이드 당시 오태곤에 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어느 날 배제성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이강철 감독은 '저렇게 볼을 때릴 줄 아는 선수가 필요하다'며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2020년 신인왕 [[소형준]] 역시 kt의 대표적인 토종 선발로 안착시키고, 2021년에는 군에서 돌아온 [[고영표]]를 리그를 대표하는 사이드 투수로 안착시키는가 하면 [[엄상백]] 역시 상무를 폭격한 이후 돌아와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kt의 토종 선발진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내내 함께한 외국인 투수 듀오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 [[윌리엄 쿠에바스]] 역시 kt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2021년 리그에서 선발 QS 1위를 기록한 원동력이 되었다. 때로는 불펜으로 강등시키겠다거나 기본이 전혀 안 되어있다는 등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면 마음껏 칭찬해주면서 선수단 장악에도 합격점을 받았다.[* 이는 야수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로하스 등 팀의 중심인 선수도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곧바로 대수비로 교체시켜버린 뒤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불펜에서도 이강철 재임 전까지 배팅볼 투수에 머물렀던 [[주권(야구선수)|주권]], 뚜렷한 좌완투수가 부족한 팀에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데려온 [[조현우(야구선수)|조현우]], SK에서 트레이드로 온 베테랑 [[전유수]], 2차 드래프트로 영입한 [[이보근]](2020시즌 한정), [[유원상]](2020시즌 한정),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온 [[박시영]] 등이 모두 이강철 체제에서 준수한 필승조로 (최소 1시즌 이상) 활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수진에서는 [[배정대]], [[김민혁(1995)|김민혁]], [[조용호(야구선수)|조용호]] 등을 2019년에 발굴하여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했지만, 2021년에는 이들의 10월의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부침을 겪음에도 신진 자원이 등장하지 않아 야수진 육성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배정대, 조용호가 부진한 와중에 김민혁이 타격감이 좋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격감 좋은 김민혁을 천대하고 타격감 안 좋은 조용호를 주구장창 기용하다 날려먹은 경기들도 있었을 정도로 쓸놈쓸 운영만 하고, 2군에서 새로운 자원을 써볼 생각을 안해 상당한 비판을 겪고 있다.[* 단 김민혁은 부상상태였음을 감안해야한다.] 다만 김민혁의 경우는 타격 능력은 있어도 수비가 불안한 점으로 인해 수비를 중시하는 감독 특성상 조용호를 안쓰고 싶어도 쓸 수 밖에 없던 점도 있다. 내야진에서는 더 암담하다. [[강백호]]는 1루로 고정은 시켰지만 수비가 불안하고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심우준]] 역시 점차 나아지는 모습이지만 타격 부분에선 여전히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특히나 아직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의 군입대에 대비해 1군에 부른 [[권동진(야구선수)|권동진]]도 주루나 수비에서 자잘자잘한 실수가 계속해서 쌓이며 아직까지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박경수]]는 노쇠화를 겪으며 2021시즌 기점으로 극심한 타격침체를 겪고있으며 은퇴가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2루수 [[신본기]]와 [[오윤석]]은 어디까지나 주전으로서 도약이 아닌 백업에 머물러 있다.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는 3루수 [[황재균]]을 대체할 만한 선수도 딱히 없는 것이 문제. 그나마 시즌 초반 [[김병희]]가 좋은 타격으로 인상을 남겼지만, 부상 이후 계속되는 잦은 부상으로 감을 잃으며 다시 시즌 초의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힌, 내야진의 뎁스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강백호]]가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으로 병역 혜택을 받는다 해도, 병역 문제, 노쇠화 및 잦은 부상, 금강불괴를 자랑하지만 35세에 접어들어 노쇠화가 우려되는 등, 주전들의 공백을 백업선수들이 메꿀 수 있는지의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포수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장성우]]를 뒷받침할 만한 젊은 포수 역시 없다. 그나마 2021년 [[허도환]]이 개인 커리어하이를 보냈으나, 그 역시 부상으로 빠진 이후에 뒷받침할 만한 좋은 포수는 없었다. [[김준태(야구선수)|김준태]]는 백업으로도 안어울리며, 입단 4년차 [[조대현(야구선수)|조대현]]은 1군 등록은 했지만 1군 경기 출전은 1경기도 없었다. 일단 2021년에 팀이 1위 순위싸움을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적극적인 기용을 잘 안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야수진이 10월에 집단부진을 겪으며 아무런 조치도 안한 것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타이브레이커와 한국시리즈 모두 잡아내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룬 명장임은 분명하다.[* 당장에 신생팀이었던 KT의 첫 5할 승률과 가을야구 진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것에 있어서 이강철의 지도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견이 없다.] 2022년에는 무엇보다 야수진에서 준수한 신진자원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 기타 == * 2013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KIA의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분류되었다. [[염경엽]] 감독 옆에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는 이강철이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김평호]] KIA 코치도 팬들과 소통을 잘하고 평가도 괜찮아 감독 후보로 거론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투수 출신인 이강철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 2013년 열린 제2회 한일 올드스타 슈퍼게임 9회초에 등판하여 평균 100km/h의 공으로 일본측의 올드스타을 상대로 우세를 보였다. * [[장채근]]은 이강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강철이는 내 피부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상의를 탈의하고 있으면 내 곁으로 와선 '형, 피부가 너무 뽀얗고 부드럽다'며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곤 했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물론 강철이가 성적 취향이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다. 강철이는 분명한 사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10&aid=0000044591|#]] [[파일:/image/410/2012/12/08/20121206_1354784088.jpg_59_20121208092402.jpg]] 1990년대 초 [[무등산]]에서 해태 선수들과의 야유회에서 [[장채근]]과 찍은 사진. * 선동열도 이강철이 자기 피부가 부드럽다고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며 비슷한 회고를 한 것을 보면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던 듯(...) * 뛰어난 성적과 더불어 곱상하고 여린 외모로 여성팬들을 몰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선동열의 증언으로는 젊은 시절 옷 좀 차려입으면 제비가 따로 없게 잘생겨서 여자 관계가 매우 복잡했고, 어느 날 야구에 집중하겠다고 여자 관계를 싹 정리했더니 그 여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룸메이트 시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50대인 현재도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편. 자기 관리도 잘 해서 배도 거의 안 나왔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젊었을 때 하얀 피부의 곱상한 외모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많이 안타까워 한다. 특히 감독이 된 후엔 스트레스로 트러블이 생긴 건지 매우 안 좋아졌다. * 그가 코칭을 해준 사이드암 투수들이 그가 팀을 떠난 후 불을 지르는 경향이 있어 사이드암 코칭에만 특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으로 KIA의 0점대 마무리였던 [[유동훈]]과 넥센의 2016시즌 신인왕 [[신재영]]. [[박치국]]도 부진하다가 다시 부활하기까지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 [[KIA 타이거즈]]의 [[맷 윌리엄스]] 감독이 KBO팀 감독들에게 인사차 선물로 와인을 주자 빈손으로 받기 그렇다고 답례품으로 연고지 수원의 명물인 [[소갈비|왕갈비]]를 답례품으로 선물해 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다른 감독들이 답례품으로 어떤것을 주게 되는지 소소한 관심을 끌었다. * 현역 시절에 달았던 '''19번'''은 그의 은퇴 이후 이강철이 키워낸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가장 달고 싶어하는 번호가 되었다. [[신용운]]과 [[손영민]]이 이 배번을 달았었다. 그러나 [[손영민]]이 임탈되고, 이강철이 넥센으로 가면서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이 아닌 뜬금없는 좌완 [[손동욱]]이 달더니 이젠 노장 우완 [[최영필]]이 달았다가, [[최영필]]의 은퇴 다음엔 2015년 1차지명 투수 [[이민우(야구선수)|이민우]]가 달았다. 이후 2018 시즌이 되어 투수인 [[손영민]]이 다시 19번을 가져가면서 원래대로 사이드암 투수가 달게되었다. 한편 넥센에서도 [[한현희]]가 이 번호를 달았지만 [[송신영]]이 돌아오면서 한현희는 원래 달던 63번을 달게 되었다. 다만 2020시즌 [[KIA 타이거즈]]에서는 투수가 아니라 내야수인 [[김태진(1995)|김태진]]이 달고 있는데, 이는 트레이드로 워낙 급하게 기아로 온 지라 번호를 고를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드 이전 이 번호를 단 [[박정수(야구선수)|박정수]]는 사이드암 투수가 맞다.] 2021년 현재는 김태진이 등번호를 5번으로 바꾼 후 사이드암인 [[윤중현]]이 달고 있다. * [[이승엽]]의 첫 홈런을 만든 장본인이자 레전드로 가게끔 만든 장본인이다.[* 2000 시즌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장채근]]이 체조 선수처럼 몸이 유연했던 투수 3명 중 한 명으로 뽑았다. 나머지 2명은 선동열과 김정수다. 제자들에게 유연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군기 반장으로 팀 내 기강을 잡을 때 기량이 좋은 선수를 대표로 혼내야 효과가 좋았다고 늘 타깃으로 삼았던 선수가 이강철이었다고 밝혔다. * [[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선동열]] 이후 2번째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감독이자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됐다. 역대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이강철 외에 [[서정환]], [[김성한]], [[유승안]],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등이 있으나 선동열을 빼고는 대부분 감독으로서 실패한 이들로 꼽힌다.[* 이강철과 선동열 외에 그나마 가을야구를 경험한 해태 출신 감독은 서정환과 김성한 뿐이다. 서정환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이던 1998년과 1999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전자 라이벌 [[LG 트윈스]], 영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에 제압당하는 바람에 경질됐고 김성한도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이던 2002년과 2003년 연달아 플레이오프로 팀을 이끌었으나 각각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에게 패하면서 미끄러졌다.] * KBO 리그 선수 출신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중 유일하게 현역 시절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출신이다. MVP 수상 이후인 1996년 11월에 축하 기념으로 [[KBS]] 예능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도 출연했다. == 연도별 주요 성적 == * '''{{{#red,#ff0000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17> {{{#ffffff 역대 기록}}} || || {{{#ffff00 연도}}} || {{{#ffff00 소속팀}}} || {{{#ffff00 경기수}}} || {{{#ffff00 이닝}}} || {{{#ffff00 승}}} || {{{#ffff00 패}}} || {{{#ffff00 세}}} || {{{#ffff00 홀}}} || {{{#ffff00 승률}}} || {{{#ffff00 ERA}}} || {{{#ffff00 피안타}}} || {{{#ffff00 피홈런}}} || {{{#ffff00 4사구}}} || {{{#ffff00 탈삼진}}} || {{{#ffff00 실점}}} || {{{#ffff00 자책점}}} || {{{#ffff00 WHIP}}} || || 1989 ||<|11> [[해태 타이거즈|해태]] || 36 || 195⅓ || 15 || 8 || 5 || - || .652 || 3.23 || 153 || 13 || '''85'''[br](5위) || '''138'''[br](4위) || 74 || 70 || 1.17 || || 1990 || '''44'''[br](3위) || '''{{{#red,#ff0000 220⅔}}}'''[br](1위) || '''16'''[br](3위) || 10 || 5 || - || .615 || 3.14 || '''163'''[br](3위) || '''{{{#red,#ff0000 24}}}'''[br](1위) || '''93'''[br](3위) || '''165'''[br](2위) || '''84'''[br](3위) || '''{{{#red,#ff0000 77}}}'''[br](1위) || 1.12 || || 1991 || 36 || '''214⅔'''[br](2위) || '''15'''[br](5위) || 11 || 3 || - || .577 || 3.19 || 158 || '''{{{#red,#ff0000 29}}}'''[br](공동 1위) || 69 || '''193'''[br](2위) || '''87'''[br](3위) || '''76'''[br](3위) || '''0.99'''[br](3위) || || 1992 || 33 || '''217⅓'''[br](2위) || '''18'''[br](2위) || 9 || 0 || - || .667 || 3.44 || '''179'''[br](4위) || '''{{{#red,#ff0000 29}}}'''[br](1위) || '''87'''[br](5위) || '''{{{#red,#ff0000 156}}}'''[br](1위) || '''88'''[br](4위) || '''83'''[br](2위) || '''1.15'''[br](5위) || || 1993 || 31 || 154 || 10 || 10 || 1 || - || .500 || 3.04 || 113 || 9 || '''78'''[br](5위) || '''131'''[br](4위) || 60 || 52 || 1.16 || || 1994 || 33 || 185⅔ || 12 || 15 || 1 || - || .444 || 3.64 || 150 || 19 || '''{{{#red,#ff0000 122}}}'''[br](1위) || '''140'''[br](5위) || '''86'''[br](2위) || '''75'''[br](5위) || 1.37 || || 1995 || 29 || 150 || 10 || 10 || 1 || - || .500 || 3.24 || 127 || 15 || 71 || 126 || 60 || 54 || 1.20 || || 1996 || 28 || 153⅔ || 10 || 9 || 1 || - || .526 || 2.46 || 114 || 11 || 60 || 119 || 43 || 42 || '''1.05'''[br](5위) || || 1997 || 30 || 162⅔ || 11 || 3 || 2 || - || '''.786'''[br](2위) || 2.99 || 130 || 14 || 75 || 128 || 63 || 54 || 1.17 || || 1998 || 31 || '''179⅓'''[br](5위) || '''15'''[br](3위) || 11 || 0 || - || .577 || 3.11 || 165 || 18 || 65 || '''160'''[br](4위) || 70 || 62 || 1.18 || || 1999 ||<-15> 1군 기록 없음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2000 || [[삼성 라이온즈|삼성]] || 14 || 37 || 1 || 4 || 0 || 0 || .200 || 7.30 || 45 || 8 || 22 || 20 || 33 || 30 || 1.68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홀}}}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2001 ||<|5> [[KIA 타이거즈|KIA]] || 27 || 56 || 2 || 3 || 1 || 1 || .400 || 6.91 || 59 || 9 || 31 || 50 || 43 || 43 || 1.41 || || 2002 || 66 || 105 || 5 || 2 || '''17'''[br](5위) || 8 || .714 || 3.17 || 82 || 12 || 46 || 97 || 41 || 37 || 1.12 || || 2003 || 67 || 68⅓ || 6 || 4 || 9 || '''14'''[br](3위) || .600 || 1.98 || 42 || 7 || 31 || 57 || 21 || 15 || 0.95 || || 2004 || '''79'''[br](3위) || 85⅓ || 6 || 2 || 7 || 7 || .750 || 2.95 || 68 || 9 || 39 || 56 || 29 || 28 || 1.16 || || 2005 || 18 || 19⅔ || 0 || 1 || 0 || 3 || .000 || 3.20 || 23 || 1 || 12 || 15 || 7 || 7 || 1.58 || ||<-2> '''[[KBO 리그]] 통산'''[br](17시즌) || 602 || '''2204⅔'''[br](3위) || '''152'''[br](3위) || 112 || 53 || 33 || 0.576 || 3.29 || 1771 || '''218'''[br](3위) || '''986'''[br](2위) || '''1751'''[br](2위) || 889 || 805 || 1.17 || ||<-3> {{{#ffffff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 1989년 || 8완투 || 3완봉 || || 1990년 || '''{{{#red,#ff0000 10완투}}}'''[br](공동 1위) || 1완봉 || || 1991년 || '''11완투'''[br](공동 4위) || '''2완봉'''[br](공동 4위) || || 1992년 || '''12완투'''[br](4위) || '''2완봉'''[br](공동 4위) || || 1993년 || 2완투 || 1완봉 || || 1994년 || 5완투 || 1완봉 || || 1995년 || 4완투 || 2완봉 || || 1996년 || 5완투 || 2완봉 || || 1997년 || 5완투 || 2완봉 || || 1998년 || 3완투 || 2완봉 || || '''[[KBO 리그]] 통산''' || 65완투 || '''18완봉'''[br](5위) || == 지도자 시절 == ||<-9> {{{#ffffff 역대 감독 전적}}}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승 }}}''' || '''{{{#ffffff 패}}}''' || '''{{{#ffffff 무}}}''' || '''{{{#ffffff 승률}}}''' || '''{{{#ffffff 정규리그}}}''' || '''{{{#ffffff 포스트시즌}}}''' || ||2019||<|3> '''[[kt wiz]]''' || 144 || 71 || 71 || 2 || .500 || 6위 || - || ||2020|| 144 || 81 || 62 || 1 || .566 || 2위 || 플레이오프 패배 (상대: [[두산 베어스]]) || ||2021|| 144 || 76 || 59 || 9 || .563 || '''1위'''[* 타이브레이커 승리를 통한 정규시즌 우승] || '''한국시리즈 우승''' (상대: [[두산 베어스]]) ||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1966년 출생]][[분류:1989년 데뷔]][[분류:2006년 은퇴]][[분류:북구(광주) 출신 인물]][[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분류:동국대학교 출신]][[분류:우완 투수]][[분류:우언우타]][[분류:해태-KIA 타이거즈/은퇴, 이적]][[분류:삼성 라이온즈/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kt wiz/역대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KBO 한국시리즈 MVP]] [include(틀:포크됨, title=이강철, version=930)]더위키에 나무위키판으로 포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