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멘트 보로실로프 r333 RAW 2022-06-22 10:47:21에 w2에서 r333판 포크됨[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전차, rd1=보로실로프 전차)] [include(틀:역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가수반)] || '''{{{#ffe400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소련군/원수)] ---- [include(틀:역대 소련 국방장관)] }}} || ||||<#c70125> {{{+1 '''{{{#FFE400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br]'''{{{#FFE400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클리멘트_보로실로프_19cc7dcd2e2f.jpg|width=100%]]}}} |||| ||<#CC0000><:>'''{{{#FFE400 이름}}}''' ||<(> [[러시아어]]: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br] [[영어]]: 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br][[한국어]]: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 ||<#CC0000><:>'''{{{#FFE400 출생}}}''' ||<(> [[1881년]] [[2월 4일]], [[러시아 제국]] 베르크네예|| ||<#CC0000><:>'''{{{#FFE400 사망}}}''' ||<(> [[1969년]] [[12월 2일]] (8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CC0000><:>'''{{{#FFE400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7-1918) [br] [[소련군]](1918-1969) || ||<#CC0000><:>'''{{{#FFE400 최종 계급}}}''' ||<(>[[육군]] [[원수(계급)|원수]] || ||<#CC0000><:>'''{{{#FFE400 주요 보직}}}''' ||<(>소련 [[국방장관]] || ||<#CC0000><:>'''{{{#FFE400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러시아 내전]] [br]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br] [[겨울전쟁]] [br] [[폴란드 침공]] [br] [[레닌그라드 공방전]] || ||<#CC0000><:>'''{{{#FFE400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이는 모두 전공(戰功)과는 상관없이 받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br] [[사회주의노력영웅]]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0e7693bc89ed988462aeb62b3430b2fa2df793536ff57d26bed0f346fe0538e7.jpg|width=100%]]|| || [[화가]] [[https://en.wikipedia.org/wiki/Isaak_Brodsky|아이작 브로드스키]]가 그린 [[초상화]] ||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급 장교|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계급)|원수]]. [[소련]] 초기 5원수(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니|부됸니]], [[미하일 투하쳅스키|투하쳅스키]], [[바실리 블류헤르|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예고로프]]) 중 하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친구였다.''' 초기 [[소련 공산당]]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적백내전기에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전쟁]]에서, 그리고 [[독소전쟁]]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졸전으로 결국 야전 지휘에서 손 떼야 했고, 전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실권을 잃은 후 막판에 정계에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clearfix] == 생애 == ===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 ===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드니프로|예카테리노슬라프]][* 현재의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1932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로 개명되었고 2016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러시아어식 명칭을 대거 청산하면서 드니프로로 개명되었다.]에서 가까운 베르크네예에서 태어났다. [[1896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파업]]에 참가하여 해고되었다. [[1903년]]에 [[볼셰비키]]에 참가했다. [[1906년]]에는 파업을 선동해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당의 전신 격인 정당.]의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스탈린과 한방을 썼고 그 인연으로 스탈린과 안면을 텄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도 출석하여 [[미하일 프룬제]]와 [[미하일 칼리닌]] 등을 알게 되었다. 동년에 다시 체포되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로 유배되었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이렇듯 청년 시절부터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 내전과 스탈린의 군사적 동지 ===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의 차리친(훗날의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스탈린과 친해졌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나 [[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 2차대전 때 보로실로프가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백내전에서의 그의 전과를 과소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그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했을 뿐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 적은 없다고 심하게 폄하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백군쪽이 영국에서 원정온 전차 사단이 동행할 정도로 높은 무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지휘관도 데니킨, 브란겔, 크라스노프 등 남러시아 백군에서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지휘 체계라고 하면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하는 적군쪽이 훨씬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어하던 볼가 강 유역은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하는 요충지였고 실제로 이곳을 잘 막아내면서 두 세력이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니)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 [[파일:attachment/St_060.jpg|width=100%]] || || [[1935년]]에 제작된 [[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 아랫쪽 가운데에 그려진 [[전차]]는 [[T-35]]이다.] ||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무명의 당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 큰 두각을 끼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차르의 은행이나 열차를 강도질해 혁명자금을 모아오는 일을 맡았고 그 와중 범죄조직과의 관계도 많아져서 당 입장에서 드러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탈린은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처세술에 뛰어나[* 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이를테면 부하가 아닌 외국인들 앞에선 절제를 잘했다. 대소련 봉쇄정책으로 유명한 조지 케넌은 자기 후임자인 찰스 볼렌이 스탈린이 부하를 노려보던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https://www.johndclare.net/cold_war7_Kennan_interview.htm|CNN 인터뷰]][[https://m.dcinside.com/board/war/1208315|번역문]]] 당시 얌전하고 별 문제되지 않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남들을 깔보는 일이 많아 적이 많았다. 이때도 트로츠키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남러시아 전선을 잘 지키고 있던 스탈린을 공격했다.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스탈린의 가장 믿을만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내며 공격했으며,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당시엔 그렇게 요직은 아니란 평가를 받던 [[서기장]] 직위와 민족문제위원직을 이용해 하급 당원들과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아갔다. 레닌이 뇌일혈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지만, 다른 간부들이 오만한 트로츠키보단 겸손한 스탈린이 낫다고 여겨 스탈린을 지지해 무시됐다. === 국방장관으로서의 오해와 실상 === >"개는 개처럼 죽어야 한다."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이 서명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하면서 남긴 코멘트.[* 이는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이후에 동참한 주코프가 22차 당대회에서 폭로한 기밀문서에서 나온 것이다.] 보로실로프는 192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25년 미하일 프룬제의 죽음 이후, 보로실로프는 국방장관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 자리는 1934년까지 맡게 된다. 프룬제의 지위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을 나눠가졌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와 더불어 스탈린의 삼두 체제([[트로이카]])와 맞먹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파인 프룬제보다는 자신의 사람이 맡는 것을 더 선호했다. 프룬제는 지병인 [[위장]]의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라고 권유받았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과다 흡입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수술은 프룬제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보로실로프는 1926년 새롭게 생긴 정치국의 정규 위원이 되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유지되었다. ||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width=100%]] || || 1935년 11월 11일 창설되고 촬영된 5명의 원수. 위의 왼쪽부터 --독보적인 수염의--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아래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쳅스키]], 보로실로프, 예고로프. 사진에서 보듯이 보로실로프가 넘버 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가서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목이 날아갔다.[* 세 사람 모두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러시아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때 원수들은 사실 다 그럴 만한 공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원수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동전의 선구자 중 한명이었던 예고로프와 달리 블류헤르의 경우 러시아 내전에서 신화적인 [[기병]] 지휘관이었던 부됸니와 마찬가지로 [[현대전]] 수행 능력은 투하쳅스키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하산 호 전투]] 당시 그가 지휘했던 소련군의 피해가 [[일본군]]보다 많았던 것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샀고 극동군을 사유화한 것도 미움받아 처형되었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lim_voroshilov.jpg|width=100%]] || || 1930년대 젊은 시절. || 보로실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처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던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관념을 매우 비판하였고, [[반역]]죄로 기소된 투하쳅스키를 재판하는 군사 재판에서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다만 한국 밀덕계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기계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군의 기계화에 대해 스탈린과 함께 지원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투하쳅스키를 비판한 이유는 투하쳅스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만 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 당시 소련군은 소화기도 제대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체코제를 비롯한 여러 수입산 총기를 병사들에게 지급했으며 기갑 전력과 항공 전력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알거 다 아는 원수가 비현실적인 요구를 해오니 국방장관인 보로실로프로서는 당연히 비판할 수 밖에 없었다.[* 군인들은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군사적 효율성만 가지고 정부에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일이 잦다.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에릭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이 50만 병력을 요구했는데, 럼스펠드가 "비현실적이다"라고 씹은 것을 가지고(결국 임기보장된 에릭 신세키를 이런 하찮은 명목으로 해임할 수는 없어서 후임자를 일찍 지명하는 것으로 그를 거세해버린다) 럼스펠드가 멍청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이라크 침공 당시 10만 정도였던 육군 병력을 50만으로 늘리는 것은 순환하는 병력을 포함해 100만 이상으로 병력을 늘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재정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일이다. 군사적으로만 보면 신세키의 말은 백번 옳았지만, 정부가 이런 식으로 예산을 쓸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럼스펠드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고려해야 했다. 이라크를 공격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무시하여 50만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예산이 없어서 50만은 못 주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의 최대 규모가 800만이었으니 육상병력의 중요성이 당시보다는 많이 낮아진 현대전을 따져보면 거의 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자는 얘기인 것이다.][* 사실 이는 2차 대전 적수였던 [[독일 국방군]]이 훨씬 심각했다.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기로 이름난 독일 답게, 전투에 뛰어난 용장들이 즐비한 집단이었지만 전술, 작전술에 뛰어났을 뿐. 전략에는 아주 무지했다. 독일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한 미육군 주재무관 콩거 대령은 전략과, 전쟁사 관한 내용은 아주 미흡하다고 평가할 정도. [[FDR]]이 이런 대전략의 천재인 [[조지 마셜]]을 전선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통설로는 대숙청으로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기계화론을 주장하던 장교들이 처형되고 소련군의 기계화 과정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출혈을 유발했다고 평가되었으나 이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과정에서 보로실로프가 함께 격하되며 나온 프로파간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실제로는 오히려 대숙청에서 기병 장교들 역시 많이 숙청되었고 보로실로프는 부됸니의 툴툴거림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감축하고 반대로 기갑 사단의 수는 두배 이상 증강했다. === [[겨울전쟁]] === [[1939년]] [[나치 독일]]과 은밀하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일으켜 [[중유럽]], [[서유럽]]을 유린하는 동안 동쪽의 [[발트 해]], [[흑해]] 연안 약소국([[발트 3국]], [[몰도바]])들을 병합하던 스탈린은 [[핀란드]]에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수비를 위해 핀란드 영토를 할양하고 핀란드 주요 영토를 조차해 줄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핀란드가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보로실로프는 친히 침공군을 이끌었고, 처음에는 4개 전선군 42만 명을 동원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철저히 관광당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처럼 자신도 [[핀란드군]] 정도는 금새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 성립 후 독립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스탈린은 발트 3국처럼 핀란드도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시킬 참이어서 소련 내의 핀란드 망명객을 중심으로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침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까지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이미 시대에 뒤처진 군인이었던 보로실로프에겐 대숙청 여파로 지휘관 공백이 큰 상황에서 40만, 축차 투입된 병력까지 추가하면 물경 100만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할 역량이 없었다. 소련군은 한줌 병력의 핀란드군에게 대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과 국방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세묜 티모셴코]]가 소련군을 총지휘했다. 티모셴코는 양적 우위를 바탕으로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 워낙 극심했기에 스탈린은 이후 핀란드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옛 친구인 보로실로프가 처참히 패한 후 돌아오자 보로실로프에게 크게 화를 냈고, 보로실로프는 이때 무능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면서(!)''' 대들었다. 이 일화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Finnish Soviet War exposed a multitude of problems in the Red Army, even though the Soviet eventually won and the Finland was forced to make considerable territorial concessions. The Soviet performance was so embarrassingly weak that it alarmed even the political leadership. Soviet deaths, more than 80,000, were much higher than the number of the Finnish dead. Khrushchev admitted that 'A victory at such a cost was actually a moral defeat.' Stalin was angry with the military commanders, and Khrushchev recalled a meeting at Stalin's dacha: >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 >겨울전쟁에서 이긴 건 소련이었고 핀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빼앗겼으나, 붉은 군대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련의 (군사) 행동은 당혹스러울만큼 취약해서 정치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다. 소련군의 사망자는 8만 명이 넘어 핀란드군의 사망자를 훨씬 상회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피로스의 승리|'그런 대가를 치르고 이긴 건 사실 정신적으론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들에게 열이 받아 있었고,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별장에서 있었던 그들의 만남을 회상했다. >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대숙청|"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 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 >Stalin(Hiroaki Kuromiya 저), 145~146쪽 그런데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런 '''[[팩트폭력|불경한 짓]]'''을 한 보로실로프를 별로 탓하지 않고 그냥 지휘권을 해임하는 선에서 그쳤다. 짐작하다시피 틀린 말은 아닌데다, 보로실로프가 없으면 스탈린은 [[붉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딴엔 이유가 충분했다지만 대숙청은 붉은 군대는 물론이고 인민들한테 엄청나게 잔인한 수준이었고, 농담이 아니라 참다 못한 붉은 군대가 파벌끼리 단합해서 ''''인민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며 집무실로 쳐들어와 스탈린을 벌집으로 만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탈린이 [[적백내전]] 때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할 때 보로실로프는 철저하게 스탈린의 편을 들었다. 그 의심병 스탈린이 소련 정치판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보로실로프 한 명 뿐이었다. 그런 최측근 절친 보로실로프를 멋대로 스탈린이 실각시켰다가는 [[임오군란|붉은 군대가 총부리를 독일이 아닌 스탈린한테 돌렸을 때 대책이 없었다.]] === [[독소전쟁]] === || [[파일:external/russiapedia.rt.com/kliment-voroshilov_4-t.jpg|width=100%]] || || [[독소전쟁]] 당시의 보로실로프 || 이렇게 겨울전쟁에서 과를 범한 보로실로프는 [[1941년]]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순식간에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쇄도했다. 보로실로프는 어떤 때는 스스로 [[권총]]을 빼들고 진두에 서서 독일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는 용맹을 보이기도 했으나 작전 지도에 있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 당연하지만 현장 최고 지휘관인 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은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소련 제 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함락 직전에 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무학이었으니. 레닌그라드가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은 보다못해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당시 자신과의 의견 충돌로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게오르기 주코프]]를 파견하였다. 주코프가 사령부에 나타나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서야 자신의 해임을 알았고,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내가 싸우던 방식으로는 지휘하기엔 전쟁이 너무나 달라졌다." 고 솔직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주코프의 지휘로 인해 1944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보로실로프를 용서했고 보로실로프는 이후에는 일선 지휘를 맡지 않고 후방 근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1947년에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휘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 1952년 보로실로프는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위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소련 최고 권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탈린 밑에 고만고만한 부하들 여러 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들은 일단 권력 투쟁 대신 권력 분점에 합의하여 여러 자리를 나눠 가졌다. 그래서 보로실로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국가원수]])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취임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NKVD]] 부장을 지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을 맡았다. 이때 권력을 분점한 말렌코프나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보로실로프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은 모두 NKVD 부장이었던 베리야를 모두 두려워했는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구실을 만들어 자신들을 체포, 처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단 협력하여 공동의 적인 베리야를 체포해 처형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베리야를 극혐했지만 베리야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루쇼프 앞에서 베리야를 찬양하며 자기 마음을 숨겼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다른 정치국원들을 먼저 설득했고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보로실로프를 찾아가 베리야 제거 계획을 말하자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1956년 보로실로프는 75주년 생일 기념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수여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공훈 덕택이 아니라 원로 대접용으로 던져 준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무려 4회나 수여받은 [[게오르기 주코프]]는 4회 중 2회의 수여 시기가 각각 1939년 8월, 1944년 7월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주코프와 보로실로프의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웅 칭호를 3번 받은 [[세묜 부됸니]]도 2차대전에서는 무능으로 해임당했고 3번 다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의 보수파(소위 반당 그룹)에 일시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1957년 흐루쇼프의 실각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재빨리 편을 바꾸어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노쇠한 데다가 [[겨울전쟁]] 이후 군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저지른 탓에 당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별로 지지 세력이 없었고,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친네에 불과했다. 1957년에는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이때 베이징 동물원의 판다들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했고 그걸 본 마오쩌둥은 소련에 판다 한쌍을 보내주었다. === 말년 === || [[파일:external/lichnosti.net/12829050941.jpg|width=100%]] || || 군 예복을 입은 노년의 보로실로프. || 1960년 5월 7일, 흐루쇼프가 뒤에 있는 소련 최고회의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 요구"를 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1960년 7월 1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보로실로프에 대하여 소련 공산당 상무회를[* 소련 공산당 상무회는 1952년 이래 기존의 정치국을 확대개편한 상설조직이다.] 구성하는 상무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1961년 10월 그의 정치적 몰락은 22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 자격을 박탈하는 식으로 완결되었다. 보로실로프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재임하던 마지막 나날의 어떤 식사 자리에서 모든 멤버들이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료들의 외면에서 이미 그가 축출될 운명임을 깨닫고 미리 선수를 써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몰락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얼굴마담]] 노릇을 시켰다.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혁명 원로였기 때문에 보수파였던 브레즈네프가 대우를 해 준 것이다. 196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복귀하고, 소련군의 창설 50주년이 되던 1968년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1969년 사망해서 다른 원수들, 유명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 [[파일:external/www.comtourist.com/moscow-kremlin-wall-voroshilov-tomb-01.jpg|width=100%]] || ||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묘비. --[[부됸니]]?-- || == 평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arshal_of_the_USSR_1976_CPA_4552.jpg|width=100%]] || || 보로실로프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 [[세묜 부됸니]]와 함께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승진하여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원흉'''으로 꼽힌다. 정실 인사의 폐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 그래도 부됸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기병]]에 관해서는 꽤나 큰 기여를 했고, 보로실로프는 적백내전 때 전차부대를 포함한 백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공이 있기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이 자리에 오른건 아니다. 보로실로프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긴 했다. 그리고 [[대숙청]]을 비난했던 일화처럼 스탈린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일갈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2차대전때 잘한 점을 꼽자면 유능한 장성 [[이반 코네프]]를 대숙청으로부터 구했다는 것과 하단에 설명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 이후 [[T-34-76|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점이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부분일 듯하다. 그리고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기계화는 반대했지만, 점진적인 기계화는 찬성'''했다.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후임 세묜 티모셴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기계화를 주장했다. 또한 대숙청 이후 살아남은 많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한 것도 이 사람의 공이다. 주코프가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게 된 것, [[할힌골 전투]]에 참가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사실 이런 야전 지휘관이 아닌 정치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보로실로프가 당장 공포스런 절대권력자 앞에서 할 말은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필요한 정책, 인사는 군말없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업적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순수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2차대전의 삽질로 인해서 적백내전 당시 보여준 활약이 뭍혔다는 점에서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당시 신생 공산 혁명정권이었다는 근본적인 체질 때문에 소련에서 보로실로프 같은 최고 지도자와 군부의 관계를 조율할 정치군인의 존재 자체는 불가피했고, 이런 국면에서 자신의 무능을 순순히 인정하고 주코프, 코네프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 맡겼다는 면에서 소련군이 초반의 재앙과 삽질을 극복하고 숙련된 강군으로 거듭난 발전에 아예 기여한 바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나마 자기 객관화는 되었다는 점에서 히틀러보단 확실히 나았다. 적백내전 이후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개인 화기 사격 솜씨는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소련군 장성들이 보로실로프 앞에서 [[나강 M1895]] 사격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한 발도 맞추지 못하자 총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장성에게 권총을 받아들더니 그 자리에서 모든 탄환을 명중시키고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동지의 사격 실력이오.'''"라고 말했다. 이후 소련군 전군에 한동안 '보로실로프처럼 쏴라' 라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져서 소련군의 개인 화기 숙련도가 약간 늘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일화인데 공산주의 국가에는 이런 식의 억지춘향 캠페인이 매우 흔하다. 당장 북한만 봐도 [[김일성]]이 무슨 훈시, 지도를 했다 혹은 [[김정은]]이 어릴 적부터 권총 사격에 능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지금도 널렸다. 다만 당시 공산당원들은 스탈린처럼 은행강도, 테러 활동 등을 거쳐 전투력이 높은 자들이 꽤 있었기에 보로실로프도 그런 과정에서 사격 실력이 숙달되어 정말로 뛰어났을 수는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혁명 이전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은행 강도와 열차 강도, 각종 [[적색테러]]로 잔뼈가 굵은 [[스탈린]]처럼 내전기에 다져진 개인 전투력과 소부대 전술 지휘 능력은 높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대장]]-[[중대장]] 혹은 [[특수부대]]의 최소 단위 제대 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 [[집단군사령관]]급 위치에 임명되었으니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규모 정규전을 상정한 [[냉전]] 시절 [[미국]]에서는 특수부대를 오래 거친 장교들은 일반 부대 출신보다 지휘 계통에서 요직으로 빠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쟁양상이 달라진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나 간간히 나오는 편.] 결론적으로, 보로실로프는 주코프와 코네프를 알아보고 밀어준 걸로 입증한 사람 보는 안목, 누구에게도 없는 특별한 장점인 [[스탈린]]과의 인간적인 친분을 감안했을 때 인민위원회급 간부에나 적합한 인물이었지, 대부대 지휘관에는 적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는 스탈린이 군내에 자신의 확실한 지지자를 심어서 군내 동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다. 보로실로프의 비판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어떤 지휘관이 유능하냐 무능하냐 이전에 더 중요한 부분이 명령체계에 복종하는가란 점이다. 투하체프스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경쟁자로 믿을 수 없었고, 예고로프는 당내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블류헤르 역시 극동에서 군벌마냥 행세했다. 부됸니조차 기병 병과를 사병화하는 태도로 숙청 직전까지 갔다. 지휘관이 우직하게 사수명령을 고수하는 게 문제일 수 있지만 자기 멋대로 부대를 후퇴시킨다면 그게 훨씬 더 큰 문제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일단 조직에 체계가 있고 군대가 통수권자에 복종을 해야지 유무능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당장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통수권자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순간에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니 말이다. 게다가 특히 일반적인 나라의 군대도 아니고 당시 소련이라는 근본적으로 군대, 경찰 같은 조직과 불편할수 밖에 없는 좌익 혁명가들이 설립한 공산주의란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향하는 신생정권이란 특수한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 기타 == ||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Stalin2C20Voroshilov.jpg|width=100%]] [[파일:attachment/Joseph_Stalin_and_Kliment_Voroshilov,_1935.jpg|width=100%]] || || 1935년, 두 명의 단란한 한때. || * 보로실로프와 스탈린은 정말 절친이었는지, 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함께 뱃놀이 갔을 때 스탈린이 농담삼아 "자네 [[영국]] [[스파이]]지?"라고 하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인생을 함께한 절친한테 그런 농담을 한다고? 에레이 시발롬아!-- --나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 이름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장성이었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 헷갈릴 수도 있다. * 1935~1958년, 1970년~199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루간스크(루한시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보로실로프그라드'로 불렸다. * 스탈린 시대의 숨막히던 사회 분위기를 잘 묘사한 [[영화]] [[이너 서클#s-1|이너 서클]]에서도 시대 변화를 보여 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웃 집에서는 보로실로프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초상화까지 걸어둘 정도로 강한 빠심을 드러내는데, 대숙청 당시 보로실로프의 인기를 반영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이웃도 결국 대숙청에 휘말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스탈린의 전속 영화 상영 기사가 된 주인공도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이 신나게 깨지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 집무실에서 실컷 갈굼당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크게 실망한다. 결국 주인공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물려받은 보로실로프 초상화를 스탈린 초상화로 바꿔 버린다. 이 과정에서 열려 있던 반지하방 창문으로 마침 지나가던 소떼들이 오줌을 갈기자 보로실로프 초상화로 오줌 세례를 막는 등 한 번 더 능욕당한다(...) * 중전차 [[보로실로프 전차]] 이름의 기원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인물의 이니셜을 딴 소련 전차로는 [[IS-2|IS 시리즈]]가 있다. 이쪽은 [[스탈린]]의 이니셜.] 영어로는 '''K'''liment '''V'''oroshilov를 줄여 KV라고 하고 러시아어로는 '''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를 줄여 КВ라고 한다. [[보로실로프 전차]]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보로실로프가 이 전차의 개발에 힘을 실어 준 것이 계기가 돼서 이 양반의 이름이 붙었다. 괜히 이 전차의 개발진들이 전차에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 [[조제프 코틴]]이 보로실로프의 사위라 후원을 받았다는 낭설이 있는데 아래 서술되어있다시피 보로실로프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코틴도 그의 사위가 아니다.] 이 전차는 그때까지 개발된 그 어떤 전차보다도 덩치가 컸으며, 무식하게 두꺼운 장갑으로 [[T-34-76|T-34]]와 함께 [[독일 국방군]]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다. 당시 독일군의 [[PaK 36|상냥한 도어노커]] [[대전차포]]로는 떡장갑 투성이인 KV를 격파하기 어려웠고, [[88mm 대공포]]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특히 변속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대전 내내 쓰이던 T-34와는 달리 1943년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보로실로바(Екатерина Ворошилова, 1892 ~ 1959)는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으로 역시 혁명가였다. 본명은 골다 고르브만(Го́лда Горбман)으로 17살에 아르한겔스크 유형 중 또 다른 혁명가인 아벨 예누키제[* 조지아계 고참 볼셰비키 중 하나로 스탈린과 친했으나 [[대숙청]]으로 사망.]와 연애를 하다가 임신했고 낙태 과정에서 불임이 되었다. 보로실로프와는 1909년부터 사귀었으며 결혼하기 위해 정교회로 개종하며 가족과 원래의 이름을 버렸다. 본인은 불임이었지만 아이들을 좋아해 고아들을 데려와 키웠다. 그 중 두 명은 [[미하일 프룬제]]의 아이였다. === 숙청의 위기 === 스탈린에게 여러 [[팩트폭력|막말]]을 하고도 살아남은 그이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테헤란 회담]]이 끝난 이후, 저녁 만찬이 열리기 전 각국 대표단들은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만든 [[https://en.wikipedia.org/wiki/Sword_of_Stalingrad|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스탈린에게 선물했다. 스탈린은 이 검을 받은 뒤 감사의 의미로 칼집에 키스를 하고는 칼을 루즈벨트에게 넘겼다. 루즈벨트는 칼을 높이 쳐들고는 "그들은 진실로 강철의 심장를 가졌습니다(Truely they had hearts of steel)."고 외쳤다.[* 강철(steel)이 스탈린(stalin)과 비슷한 점을 이용해 스탈린에게도 찬사를 보낸 것이다.] || [[파일:스탈린 칼 킁킁.jpg|width=100%]] || || 검에 키스하는 스탈린. 오른쪽의 인물이 보로실로프로 보인다. || 루즈벨트는 검을 다시 처칠에게 주었고, 처칠은 검을 스탈린 옆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건넸는데, 보로실로프가 허둥대어 칼집을 거꾸로 드는 바람에 '''칼이 빠져 그대로 땅에 내동댕이쳤다.''' [Include(틀:navervid, vid=9BE58C7654CF25C7C647CCC6D4CBF0CA1DFB,outkey=V1245d2023fa578a7774c8880c6dfa2b1982a78936706cdad66c18880c6dfa2b1982a)] 스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보로실로프의 행동은 소련의 체면을 떨어뜨린 것은 물론이고, 미신을 잘 믿는 스탈린에게는 불길한 것이었다. 처칠의 통역관이었던 휴 룽기(Hugh Lunghi)는 스탈린이 주먹을 꽉 진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보로실로프는 행사가 끝난 후 필사적으로 처칠에게 사과했다. 처칠히 괜찮다며 받아들이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야 안심했다. 마침 처칠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는 생일 축하 인사 또한 건넸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은 보로실로프가 돌아간 뒤 주변 사람들에게 '''"그 늙은 멍청이는 그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The old fool can't even get that right!)"'''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혐성국]]의 [[혐성]]질-- || [[파일:스탈린 보로실로프 칼.jpg|width=100%]] || || 스탈린그라드의 검. 현재는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 [[대숙청]] 당시 스탈린은 단순한 실수도 기본 시베리아 [[굴라크]]형에, 여차하면 [[사형]]까지 남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로실로프는 당시 강대국들이 모인 중요한 회담에서 이런 외교적 결례를 했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총살형|총살]] 당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 주요 수훈 내역 ==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1956, 1968) * [[사회주의노력영웅]] (1960) * [[레닌훈장]] 8회 (1935, 1938, 1941 ,1945, 1951, 1956, 1961, 1968) * [[적기훈장]] 6회 (1919, 1921, 1925, 1930, 1944, 1948) * 수보로프 1급 훈장 (1944) [[분류:1881년 출생]] [[분류:1969년 사망]] [[분류:러시아제국군/군인]] [[분류:소련 국방장관]] [[분류: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분류:소련군 원수]]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분류:소비에트연방영웅]]보낼 RAW[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전차, rd1=보로실로프 전차)] [include(틀:역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가수반)] || '''{{{#ffe400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소련군/원수)] ---- [include(틀:역대 소련 국방장관)] }}} || ||||<#c70125> {{{+1 '''{{{#FFE400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br]'''{{{#FFE400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클리멘트_보로실로프_19cc7dcd2e2f.jpg|width=100%]]}}} |||| ||<#CC0000><:>'''{{{#FFE400 이름}}}''' ||<(> [[러시아어]]: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br] [[영어]]: 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br][[한국어]]: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 ||<#CC0000><:>'''{{{#FFE400 출생}}}''' ||<(> [[1881년]] [[2월 4일]], [[러시아 제국]] 베르크네예|| ||<#CC0000><:>'''{{{#FFE400 사망}}}''' ||<(> [[1969년]] [[12월 2일]] (8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CC0000><:>'''{{{#FFE400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7-1918) [br] [[소련군]](1918-1969) || ||<#CC0000><:>'''{{{#FFE400 최종 계급}}}''' ||<(>[[육군]] [[원수(계급)|원수]] || ||<#CC0000><:>'''{{{#FFE400 주요 보직}}}''' ||<(>소련 [[국방장관]] || ||<#CC0000><:>'''{{{#FFE400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러시아 내전]] [br]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br] [[겨울전쟁]] [br] [[폴란드 침공]] [br] [[레닌그라드 공방전]] || ||<#CC0000><:>'''{{{#FFE400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이는 모두 전공(戰功)과는 상관없이 받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br] [[사회주의노력영웅]]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0e7693bc89ed988462aeb62b3430b2fa2df793536ff57d26bed0f346fe0538e7.jpg|width=100%]]|| || [[화가]] [[https://en.wikipedia.org/wiki/Isaak_Brodsky|아이작 브로드스키]]가 그린 [[초상화]] ||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군]]의 [[육군]] [[장성급 장교|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계급)|원수]]. [[소련]] 초기 5원수(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니|부됸니]], [[미하일 투하쳅스키|투하쳅스키]], [[바실리 블류헤르|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예고로프]]) 중 하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친구였다.''' 초기 [[소련 공산당]]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적백내전기에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전쟁]]에서, 그리고 [[독소전쟁]]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졸전으로 결국 야전 지휘에서 손 떼야 했고, 전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실권을 잃은 후 막판에 정계에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clearfix] == 생애 == ===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 ===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드니프로|예카테리노슬라프]][* 현재의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1932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로 개명되었고 2016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러시아어식 명칭을 대거 청산하면서 드니프로로 개명되었다.]에서 가까운 베르크네예에서 태어났다. [[1896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파업]]에 참가하여 해고되었다. [[1903년]]에 [[볼셰비키]]에 참가했다. [[1906년]]에는 파업을 선동해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당의 전신 격인 정당.]의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스탈린과 한방을 썼고 그 인연으로 스탈린과 안면을 텄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도 출석하여 [[미하일 프룬제]]와 [[미하일 칼리닌]] 등을 알게 되었다. 동년에 다시 체포되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로 유배되었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이렇듯 청년 시절부터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 내전과 스탈린의 군사적 동지 ===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의 차리친(훗날의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스탈린과 친해졌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나 [[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 2차대전 때 보로실로프가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백내전에서의 그의 전과를 과소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그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했을 뿐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 적은 없다고 심하게 폄하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백군쪽이 영국에서 원정온 전차 사단이 동행할 정도로 높은 무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지휘관도 데니킨, 브란겔, 크라스노프 등 남러시아 백군에서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지휘 체계라고 하면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하는 적군쪽이 훨씬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어하던 볼가 강 유역은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하는 요충지였고 실제로 이곳을 잘 막아내면서 두 세력이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니)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 [[파일:attachment/St_060.jpg|width=100%]] || || [[1935년]]에 제작된 [[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 아랫쪽 가운데에 그려진 [[전차]]는 [[T-35]]이다.] ||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무명의 당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 큰 두각을 끼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차르의 은행이나 열차를 강도질해 혁명자금을 모아오는 일을 맡았고 그 와중 범죄조직과의 관계도 많아져서 당 입장에서 드러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탈린은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처세술에 뛰어나[* 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이를테면 부하가 아닌 외국인들 앞에선 절제를 잘했다. 대소련 봉쇄정책으로 유명한 조지 케넌은 자기 후임자인 찰스 볼렌이 스탈린이 부하를 노려보던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https://www.johndclare.net/cold_war7_Kennan_interview.htm|CNN 인터뷰]][[https://m.dcinside.com/board/war/1208315|번역문]]] 당시 얌전하고 별 문제되지 않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남들을 깔보는 일이 많아 적이 많았다. 이때도 트로츠키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남러시아 전선을 잘 지키고 있던 스탈린을 공격했다.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스탈린의 가장 믿을만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내며 공격했으며,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당시엔 그렇게 요직은 아니란 평가를 받던 [[서기장]] 직위와 민족문제위원직을 이용해 하급 당원들과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아갔다. 레닌이 뇌일혈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지만, 다른 간부들이 오만한 트로츠키보단 겸손한 스탈린이 낫다고 여겨 스탈린을 지지해 무시됐다. === 국방장관으로서의 오해와 실상 === >"개는 개처럼 죽어야 한다."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이 서명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하면서 남긴 코멘트.[* 이는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이후에 동참한 주코프가 22차 당대회에서 폭로한 기밀문서에서 나온 것이다.] 보로실로프는 192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25년 미하일 프룬제의 죽음 이후, 보로실로프는 국방장관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 자리는 1934년까지 맡게 된다. 프룬제의 지위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을 나눠가졌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와 더불어 스탈린의 삼두 체제([[트로이카]])와 맞먹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파인 프룬제보다는 자신의 사람이 맡는 것을 더 선호했다. 프룬제는 지병인 [[위장]]의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라고 권유받았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과다 흡입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수술은 프룬제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보로실로프는 1926년 새롭게 생긴 정치국의 정규 위원이 되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유지되었다. ||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width=100%]] || || 1935년 11월 11일 창설되고 촬영된 5명의 원수. 위의 왼쪽부터 --독보적인 수염의--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아래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쳅스키]], 보로실로프, 예고로프. 사진에서 보듯이 보로실로프가 넘버 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가서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목이 날아갔다.[* 세 사람 모두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러시아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때 원수들은 사실 다 그럴 만한 공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원수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동전의 선구자 중 한명이었던 예고로프와 달리 블류헤르의 경우 러시아 내전에서 신화적인 [[기병]] 지휘관이었던 부됸니와 마찬가지로 [[현대전]] 수행 능력은 투하쳅스키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하산 호 전투]] 당시 그가 지휘했던 소련군의 피해가 [[일본군]]보다 많았던 것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샀고 극동군을 사유화한 것도 미움받아 처형되었다.]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lim_voroshilov.jpg|width=100%]] || || 1930년대 젊은 시절. || 보로실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처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던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관념을 매우 비판하였고, [[반역]]죄로 기소된 투하쳅스키를 재판하는 군사 재판에서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다만 한국 밀덕계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기계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군의 기계화에 대해 스탈린과 함께 지원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투하쳅스키를 비판한 이유는 투하쳅스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만 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 당시 소련군은 소화기도 제대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체코제를 비롯한 여러 수입산 총기를 병사들에게 지급했으며 기갑 전력과 항공 전력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알거 다 아는 원수가 비현실적인 요구를 해오니 국방장관인 보로실로프로서는 당연히 비판할 수 밖에 없었다.[* 군인들은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군사적 효율성만 가지고 정부에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일이 잦다.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에릭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이 50만 병력을 요구했는데, 럼스펠드가 "비현실적이다"라고 씹은 것을 가지고(결국 임기보장된 에릭 신세키를 이런 하찮은 명목으로 해임할 수는 없어서 후임자를 일찍 지명하는 것으로 그를 거세해버린다) 럼스펠드가 멍청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이라크 침공 당시 10만 정도였던 육군 병력을 50만으로 늘리는 것은 순환하는 병력을 포함해 100만 이상으로 병력을 늘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재정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일이다. 군사적으로만 보면 신세키의 말은 백번 옳았지만, 정부가 이런 식으로 예산을 쓸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럼스펠드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고려해야 했다. 이라크를 공격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무시하여 50만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예산이 없어서 50만은 못 주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의 최대 규모가 800만이었으니 육상병력의 중요성이 당시보다는 많이 낮아진 현대전을 따져보면 거의 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자는 얘기인 것이다.][* 사실 이는 2차 대전 적수였던 [[독일 국방군]]이 훨씬 심각했다.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기로 이름난 독일 답게, 전투에 뛰어난 용장들이 즐비한 집단이었지만 전술, 작전술에 뛰어났을 뿐. 전략에는 아주 무지했다. 독일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한 미육군 주재무관 콩거 대령은 전략과, 전쟁사 관한 내용은 아주 미흡하다고 평가할 정도. [[FDR]]이 이런 대전략의 천재인 [[조지 마셜]]을 전선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통설로는 대숙청으로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기계화론을 주장하던 장교들이 처형되고 소련군의 기계화 과정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출혈을 유발했다고 평가되었으나 이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과정에서 보로실로프가 함께 격하되며 나온 프로파간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실제로는 오히려 대숙청에서 기병 장교들 역시 많이 숙청되었고 보로실로프는 부됸니의 툴툴거림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감축하고 반대로 기갑 사단의 수는 두배 이상 증강했다. === [[겨울전쟁]] === [[1939년]] [[나치 독일]]과 은밀하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일으켜 [[중유럽]], [[서유럽]]을 유린하는 동안 동쪽의 [[발트 해]], [[흑해]] 연안 약소국([[발트 3국]], [[몰도바]])들을 병합하던 스탈린은 [[핀란드]]에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수비를 위해 핀란드 영토를 할양하고 핀란드 주요 영토를 조차해 줄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핀란드가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보로실로프는 친히 침공군을 이끌었고, 처음에는 4개 전선군 42만 명을 동원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철저히 관광당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처럼 자신도 [[핀란드군]] 정도는 금새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 성립 후 독립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스탈린은 발트 3국처럼 핀란드도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시킬 참이어서 소련 내의 핀란드 망명객을 중심으로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침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까지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이미 시대에 뒤처진 군인이었던 보로실로프에겐 대숙청 여파로 지휘관 공백이 큰 상황에서 40만, 축차 투입된 병력까지 추가하면 물경 100만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할 역량이 없었다. 소련군은 한줌 병력의 핀란드군에게 대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과 국방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세묜 티모셴코]]가 소련군을 총지휘했다. 티모셴코는 양적 우위를 바탕으로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 워낙 극심했기에 스탈린은 이후 핀란드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옛 친구인 보로실로프가 처참히 패한 후 돌아오자 보로실로프에게 크게 화를 냈고, 보로실로프는 이때 무능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면서(!)''' 대들었다. 이 일화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Finnish Soviet War exposed a multitude of problems in the Red Army, even though the Soviet eventually won and the Finland was forced to make considerable territorial concessions. The Soviet performance was so embarrassingly weak that it alarmed even the political leadership. Soviet deaths, more than 80,000, were much higher than the number of the Finnish dead. Khrushchev admitted that 'A victory at such a cost was actually a moral defeat.' Stalin was angry with the military commanders, and Khrushchev recalled a meeting at Stalin's dacha: >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 >겨울전쟁에서 이긴 건 소련이었고 핀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빼앗겼으나, 붉은 군대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련의 (군사) 행동은 당혹스러울만큼 취약해서 정치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다. 소련군의 사망자는 8만 명이 넘어 핀란드군의 사망자를 훨씬 상회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피로스의 승리|'그런 대가를 치르고 이긴 건 사실 정신적으론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들에게 열이 받아 있었고,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별장에서 있었던 그들의 만남을 회상했다. >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대숙청|"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 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다.''' >---- >Stalin(Hiroaki Kuromiya 저), 145~146쪽 그런데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런 '''[[팩트폭력|불경한 짓]]'''을 한 보로실로프를 별로 탓하지 않고 그냥 지휘권을 해임하는 선에서 그쳤다. 짐작하다시피 틀린 말은 아닌데다, 보로실로프가 없으면 스탈린은 [[붉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딴엔 이유가 충분했다지만 대숙청은 붉은 군대는 물론이고 인민들한테 엄청나게 잔인한 수준이었고, 농담이 아니라 참다 못한 붉은 군대가 파벌끼리 단합해서 ''''인민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며 집무실로 쳐들어와 스탈린을 벌집으로 만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탈린이 [[적백내전]] 때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할 때 보로실로프는 철저하게 스탈린의 편을 들었다. 그 의심병 스탈린이 소련 정치판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보로실로프 한 명 뿐이었다. 그런 최측근 절친 보로실로프를 멋대로 스탈린이 실각시켰다가는 [[임오군란|붉은 군대가 총부리를 독일이 아닌 스탈린한테 돌렸을 때 대책이 없었다.]] === [[독소전쟁]] === || [[파일:external/russiapedia.rt.com/kliment-voroshilov_4-t.jpg|width=100%]] || || [[독소전쟁]] 당시의 보로실로프 || 이렇게 겨울전쟁에서 과를 범한 보로실로프는 [[1941년]]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순식간에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쇄도했다. 보로실로프는 어떤 때는 스스로 [[권총]]을 빼들고 진두에 서서 독일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는 용맹을 보이기도 했으나 작전 지도에 있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 당연하지만 현장 최고 지휘관인 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은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소련 제 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함락 직전에 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무학이었으니. 레닌그라드가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은 보다못해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당시 자신과의 의견 충돌로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게오르기 주코프]]를 파견하였다. 주코프가 사령부에 나타나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서야 자신의 해임을 알았고,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내가 싸우던 방식으로는 지휘하기엔 전쟁이 너무나 달라졌다." 고 솔직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주코프의 지휘로 인해 1944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보로실로프를 용서했고 보로실로프는 이후에는 일선 지휘를 맡지 않고 후방 근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1947년에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휘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 1952년 보로실로프는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위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소련 최고 권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탈린 밑에 고만고만한 부하들 여러 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들은 일단 권력 투쟁 대신 권력 분점에 합의하여 여러 자리를 나눠 가졌다. 그래서 보로실로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국가원수]])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취임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NKVD]] 부장을 지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을 맡았다. 이때 권력을 분점한 말렌코프나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보로실로프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은 모두 NKVD 부장이었던 베리야를 모두 두려워했는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구실을 만들어 자신들을 체포, 처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단 협력하여 공동의 적인 베리야를 체포해 처형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베리야를 극혐했지만 베리야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루쇼프 앞에서 베리야를 찬양하며 자기 마음을 숨겼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다른 정치국원들을 먼저 설득했고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보로실로프를 찾아가 베리야 제거 계획을 말하자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1956년 보로실로프는 75주년 생일 기념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수여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공훈 덕택이 아니라 원로 대접용으로 던져 준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무려 4회나 수여받은 [[게오르기 주코프]]는 4회 중 2회의 수여 시기가 각각 1939년 8월, 1944년 7월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주코프와 보로실로프의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웅 칭호를 3번 받은 [[세묜 부됸니]]도 2차대전에서는 무능으로 해임당했고 3번 다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의 보수파(소위 반당 그룹)에 일시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1957년 흐루쇼프의 실각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재빨리 편을 바꾸어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노쇠한 데다가 [[겨울전쟁]] 이후 군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저지른 탓에 당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별로 지지 세력이 없었고,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친네에 불과했다. 1957년에는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이때 베이징 동물원의 판다들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했고 그걸 본 마오쩌둥은 소련에 판다 한쌍을 보내주었다. === 말년 === || [[파일:external/lichnosti.net/12829050941.jpg|width=100%]] || || 군 예복을 입은 노년의 보로실로프. || 1960년 5월 7일, 흐루쇼프가 뒤에 있는 소련 최고회의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 요구"를 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1960년 7월 1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보로실로프에 대하여 소련 공산당 상무회를[* 소련 공산당 상무회는 1952년 이래 기존의 정치국을 확대개편한 상설조직이다.] 구성하는 상무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1961년 10월 그의 정치적 몰락은 22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 자격을 박탈하는 식으로 완결되었다. 보로실로프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재임하던 마지막 나날의 어떤 식사 자리에서 모든 멤버들이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료들의 외면에서 이미 그가 축출될 운명임을 깨닫고 미리 선수를 써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몰락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얼굴마담]] 노릇을 시켰다.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혁명 원로였기 때문에 보수파였던 브레즈네프가 대우를 해 준 것이다. 196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복귀하고, 소련군의 창설 50주년이 되던 1968년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1969년 사망해서 다른 원수들, 유명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 [[파일:external/www.comtourist.com/moscow-kremlin-wall-voroshilov-tomb-01.jpg|width=100%]] || ||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묘비. --[[부됸니]]?-- || == 평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arshal_of_the_USSR_1976_CPA_4552.jpg|width=100%]] || || 보로실로프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 [[세묜 부됸니]]와 함께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승진하여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원흉'''으로 꼽힌다. 정실 인사의 폐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 그래도 부됸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기병]]에 관해서는 꽤나 큰 기여를 했고, 보로실로프는 적백내전 때 전차부대를 포함한 백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공이 있기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이 자리에 오른건 아니다. 보로실로프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긴 했다. 그리고 [[대숙청]]을 비난했던 일화처럼 스탈린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일갈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2차대전때 잘한 점을 꼽자면 유능한 장성 [[이반 코네프]]를 대숙청으로부터 구했다는 것과 하단에 설명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 이후 [[T-34-76|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점이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부분일 듯하다. 그리고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기계화는 반대했지만, 점진적인 기계화는 찬성'''했다.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후임 세묜 티모셴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기계화를 주장했다. 또한 대숙청 이후 살아남은 많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한 것도 이 사람의 공이다. 주코프가 키에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게 된 것, [[할힌골 전투]]에 참가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사실 이런 야전 지휘관이 아닌 정치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보로실로프가 당장 공포스런 절대권력자 앞에서 할 말은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필요한 정책, 인사는 군말없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업적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순수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2차대전의 삽질로 인해서 적백내전 당시 보여준 활약이 뭍혔다는 점에서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당시 신생 공산 혁명정권이었다는 근본적인 체질 때문에 소련에서 보로실로프 같은 최고 지도자와 군부의 관계를 조율할 정치군인의 존재 자체는 불가피했고, 이런 국면에서 자신의 무능을 순순히 인정하고 주코프, 코네프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 맡겼다는 면에서 소련군이 초반의 재앙과 삽질을 극복하고 숙련된 강군으로 거듭난 발전에 아예 기여한 바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나마 자기 객관화는 되었다는 점에서 히틀러보단 확실히 나았다. 적백내전 이후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개인 화기 사격 솜씨는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소련군 장성들이 보로실로프 앞에서 [[나강 M1895]] 사격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한 발도 맞추지 못하자 총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장성에게 권총을 받아들더니 그 자리에서 모든 탄환을 명중시키고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동지의 사격 실력이오.'''"라고 말했다. 이후 소련군 전군에 한동안 '보로실로프처럼 쏴라' 라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져서 소련군의 개인 화기 숙련도가 약간 늘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일화인데 공산주의 국가에는 이런 식의 억지춘향 캠페인이 매우 흔하다. 당장 북한만 봐도 [[김일성]]이 무슨 훈시, 지도를 했다 혹은 [[김정은]]이 어릴 적부터 권총 사격에 능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지금도 널렸다. 다만 당시 공산당원들은 스탈린처럼 은행강도, 테러 활동 등을 거쳐 전투력이 높은 자들이 꽤 있었기에 보로실로프도 그런 과정에서 사격 실력이 숙달되어 정말로 뛰어났을 수는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혁명 이전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은행 강도와 열차 강도, 각종 [[적색테러]]로 잔뼈가 굵은 [[스탈린]]처럼 내전기에 다져진 개인 전투력과 소부대 전술 지휘 능력은 높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대장]]-[[중대장]] 혹은 [[특수부대]]의 최소 단위 제대 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 [[집단군사령관]]급 위치에 임명되었으니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규모 정규전을 상정한 [[냉전]] 시절 [[미국]]에서는 특수부대를 오래 거친 장교들은 일반 부대 출신보다 지휘 계통에서 요직으로 빠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쟁양상이 달라진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나 간간히 나오는 편.] 결론적으로, 보로실로프는 주코프와 코네프를 알아보고 밀어준 걸로 입증한 사람 보는 안목, 누구에게도 없는 특별한 장점인 [[스탈린]]과의 인간적인 친분을 감안했을 때 인민위원회급 간부에나 적합한 인물이었지, 대부대 지휘관에는 적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는 스탈린이 군내에 자신의 확실한 지지자를 심어서 군내 동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다. 보로실로프의 비판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어떤 지휘관이 유능하냐 무능하냐 이전에 더 중요한 부분이 명령체계에 복종하는가란 점이다. 투하체프스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경쟁자로 믿을 수 없었고, 예고로프는 당내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블류헤르 역시 극동에서 군벌마냥 행세했다. 부됸니조차 기병 병과를 사병화하는 태도로 숙청 직전까지 갔다. 지휘관이 우직하게 사수명령을 고수하는 게 문제일 수 있지만 자기 멋대로 부대를 후퇴시킨다면 그게 훨씬 더 큰 문제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일단 조직에 체계가 있고 군대가 통수권자에 복종을 해야지 유무능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당장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통수권자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순간에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니 말이다. 게다가 특히 일반적인 나라의 군대도 아니고 당시 소련이라는 근본적으로 군대, 경찰 같은 조직과 불편할수 밖에 없는 좌익 혁명가들이 설립한 공산주의란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향하는 신생정권이란 특수한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 기타 == ||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Stalin2C20Voroshilov.jpg|width=100%]] [[파일:attachment/Joseph_Stalin_and_Kliment_Voroshilov,_1935.jpg|width=100%]] || || 1935년, 두 명의 단란한 한때. || * 보로실로프와 스탈린은 정말 절친이었는지, 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함께 뱃놀이 갔을 때 스탈린이 농담삼아 "자네 [[영국]] [[스파이]]지?"라고 하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인생을 함께한 절친한테 그런 농담을 한다고? 에레이 시발롬아!-- --나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 이름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군 장성이었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와 헷갈릴 수도 있다. * 1935~1958년, 1970년~199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루간스크(루한시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보로실로프그라드'로 불렸다. * 스탈린 시대의 숨막히던 사회 분위기를 잘 묘사한 [[영화]] [[이너 서클#s-1|이너 서클]]에서도 시대 변화를 보여 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웃 집에서는 보로실로프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초상화까지 걸어둘 정도로 강한 빠심을 드러내는데, 대숙청 당시 보로실로프의 인기를 반영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이웃도 결국 대숙청에 휘말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스탈린의 전속 영화 상영 기사가 된 주인공도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이 신나게 깨지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 집무실에서 실컷 갈굼당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크게 실망한다. 결국 주인공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물려받은 보로실로프 초상화를 스탈린 초상화로 바꿔 버린다. 이 과정에서 열려 있던 반지하방 창문으로 마침 지나가던 소떼들이 오줌을 갈기자 보로실로프 초상화로 오줌 세례를 막는 등 한 번 더 능욕당한다(...) * 중전차 [[보로실로프 전차]] 이름의 기원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인물의 이니셜을 딴 소련 전차로는 [[IS-2|IS 시리즈]]가 있다. 이쪽은 [[스탈린]]의 이니셜.] 영어로는 '''K'''liment '''V'''oroshilov를 줄여 KV라고 하고 러시아어로는 '''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를 줄여 КВ라고 한다. [[보로실로프 전차]]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보로실로프가 이 전차의 개발에 힘을 실어 준 것이 계기가 돼서 이 양반의 이름이 붙었다. 괜히 이 전차의 개발진들이 전차에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 [[조제프 코틴]]이 보로실로프의 사위라 후원을 받았다는 낭설이 있는데 아래 서술되어있다시피 보로실로프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코틴도 그의 사위가 아니다.] 이 전차는 그때까지 개발된 그 어떤 전차보다도 덩치가 컸으며, 무식하게 두꺼운 장갑으로 [[T-34-76|T-34]]와 함께 [[독일 국방군]]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다. 당시 독일군의 [[PaK 36|상냥한 도어노커]] [[대전차포]]로는 떡장갑 투성이인 KV를 격파하기 어려웠고, [[88mm 대공포]]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특히 변속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대전 내내 쓰이던 T-34와는 달리 1943년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보로실로바(Екатерина Ворошилова, 1892 ~ 1959)는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으로 역시 혁명가였다. 본명은 골다 고르브만(Го́лда Горбман)으로 17살에 아르한겔스크 유형 중 또 다른 혁명가인 아벨 예누키제[* 조지아계 고참 볼셰비키 중 하나로 스탈린과 친했으나 [[대숙청]]으로 사망.]와 연애를 하다가 임신했고 낙태 과정에서 불임이 되었다. 보로실로프와는 1909년부터 사귀었으며 결혼하기 위해 정교회로 개종하며 가족과 원래의 이름을 버렸다. 본인은 불임이었지만 아이들을 좋아해 고아들을 데려와 키웠다. 그 중 두 명은 [[미하일 프룬제]]의 아이였다. === 숙청의 위기 === 스탈린에게 여러 [[팩트폭력|막말]]을 하고도 살아남은 그이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테헤란 회담]]이 끝난 이후, 저녁 만찬이 열리기 전 각국 대표단들은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만든 [[https://en.wikipedia.org/wiki/Sword_of_Stalingrad|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스탈린에게 선물했다. 스탈린은 이 검을 받은 뒤 감사의 의미로 칼집에 키스를 하고는 칼을 루즈벨트에게 넘겼다. 루즈벨트는 칼을 높이 쳐들고는 "그들은 진실로 강철의 심장를 가졌습니다(Truely they had hearts of steel)."고 외쳤다.[* 강철(steel)이 스탈린(stalin)과 비슷한 점을 이용해 스탈린에게도 찬사를 보낸 것이다.] || [[파일:스탈린 칼 킁킁.jpg|width=100%]] || || 검에 키스하는 스탈린. 오른쪽의 인물이 보로실로프로 보인다. || 루즈벨트는 검을 다시 처칠에게 주었고, 처칠은 검을 스탈린 옆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건넸는데, 보로실로프가 허둥대어 칼집을 거꾸로 드는 바람에 '''칼이 빠져 그대로 땅에 내동댕이쳤다.''' [Include(틀:navervid, vid=9BE58C7654CF25C7C647CCC6D4CBF0CA1DFB,outkey=V1245d2023fa578a7774c8880c6dfa2b1982a78936706cdad66c18880c6dfa2b1982a)] 스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보로실로프의 행동은 소련의 체면을 떨어뜨린 것은 물론이고, 미신을 잘 믿는 스탈린에게는 불길한 것이었다. 처칠의 통역관이었던 휴 룽기(Hugh Lunghi)는 스탈린이 주먹을 꽉 진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보로실로프는 행사가 끝난 후 필사적으로 처칠에게 사과했다. 처칠히 괜찮다며 받아들이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야 안심했다. 마침 처칠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는 생일 축하 인사 또한 건넸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은 보로실로프가 돌아간 뒤 주변 사람들에게 '''"그 늙은 멍청이는 그런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The old fool can't even get that right!)"'''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혐성국]]의 [[혐성]]질-- || [[파일:스탈린 보로실로프 칼.jpg|width=100%]] || || 스탈린그라드의 검. 현재는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 [[대숙청]] 당시 스탈린은 단순한 실수도 기본 시베리아 [[굴라크]]형에, 여차하면 [[사형]]까지 남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로실로프는 당시 강대국들이 모인 중요한 회담에서 이런 외교적 결례를 했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총살형|총살]] 당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 주요 수훈 내역 ==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1956, 1968) * [[사회주의노력영웅]] (1960) * [[레닌훈장]] 8회 (1935, 1938, 1941 ,1945, 1951, 1956, 1961, 1968) * [[적기훈장]] 6회 (1919, 1921, 1925, 1930, 1944, 1948) * 수보로프 1급 훈장 (1944) [[분류:1881년 출생]] [[분류:1969년 사망]] [[분류:러시아제국군/군인]] [[분류:소련 국방장관]] [[분류: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분류:소련군 원수]]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분류:소비에트연방영웅]] [include(틀:포크됨, title=클리멘트 보로실로프, version=333)]더위키에 나무위키판으로 포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