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북한) r164 RAW 2022-06-22 10:40:15에 w2에서 r164판 포크됨[include(틀:역대 북한 국방상)]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0000, #FF0000 20%, #FF0000 80%, #FF0000)" {{{#fff '''제4대 민족보위상[br]{{{+1 최현 }}}[br]崔賢 | Choi Hyu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hoihyun.jpg|width=100%]]}}} || ||<|2> '''출생''' ||[[1907년]] [[7월 15일]] (음력 6월 6일) || ||[[청나라|대청]] [[지린성]] [[훈춘시|훈춘현]] || || '''사망''' ||[[1982년]] [[4월 10일]] (향년 75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로, 이후 북한의 군인, 북한의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최룡해]]의 부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친위쿠데타에 가담하는 등의 공헌으로 [[인민무력상|인민무력부장]](1969년~1976년)까지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 생애 == ===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 1907년 7월 15일 중국 [[지린 성|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최득권이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 최룡해의 조부, 그의 고향은 [[https://m.cafe.daum.net/sisa-1/dqFG/64|양강도 혜산(대한민국 기준으로 함경남도 혜산)]] 출생.]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 이 때문에 최현을 가리켜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독립군 가문 출신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속해있는 항일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그 후 간도에 돌아와 민족주의 성향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에는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2년까지 [[연길시|연길]]의 감옥에 복역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현은 출소한 해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9월 그보다 5살 연하인 [[김일성]]과 처음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군사활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최현은 김일성의 눈에 들어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했고, 그 결과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이 됐다. 최현은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으로 김일성과 함께 1937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출중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문맹이라서 지휘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어를 못했던 탓에, 방면군 사령관 지위에 이르렀던 김일성과 달리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진 못했다. === [[한국 전쟁]] ===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 [[6.25 전쟁]] 전에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장(☆)이 됐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북한)|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1912)|김웅]], [[김일(북한)|김일]], 전태룡, [[최용진]], [[김무정|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6.25 전쟁]]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6월 26일 16시경에 대한민국 국군 17연대의 주력부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없이 최현의 눈 앞에서 배를 타고 최현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후퇴하였다.] 6월 27일, 최현 부대는 [[해주]]에 진입하였다. 그 후 [[개성시|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6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참조.] 7월에는 김일성에 의해 38선 경비여단장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제2군단장([[김광협]])과 그 예하의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보직해임하여[* 김일성은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쉽게 설명하면 군단장(☆☆☆)을 참모장(☆)으로 강등, 사단장(☆☆)을 여단장(***)으로 강등시킨 것과 비슷하다.] 제2사단장이라는 고위직책이 그에게 돌아왔다. 사실 인민군 2사단의 본래 계획은 춘천 방면을 빠르게 돌파한 뒤 서울 남측의 [[이천시|이천]]-[[수원시|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기동해 국군의 배후를 차단, 포위섬멸을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게다가 이들은 [[팔로군]]에서 인계받은 부대 정도를 제외하고 인민군 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 김일성의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이들이 첫 전투인 [[춘천 전투]]에서 전멸당함으로서 계획이 틀어졌고 이에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에서 최현으로 교체됐는데, 당시 그의 나이 겨우 43세였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북한군은 건군 초기인지라 [[리학구|20대 후반의 사단 참모장]], [[강건(북한)|30대 초반의 총참모장]], [[방호산|30대 중반의 군단장]] 등, 직급에 비해 나이가 많지는 않은 고위 군관들이 꽤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나이의 고위 장교들이 있는 현상은 똑같이 건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오|20대 후반의 사단장]]이라던가, [[백선엽|30대 초반의 4성 장군]]이라던가...][* 참고로 이 당시에 김광협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된 사람이 김일성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김무정]]이다.] 사단장이 된 최현은 재정비를 마친 2사단을 이끌고 꾸역꾸역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진천 전투|진천에서 김석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사단을 만나 진격이 일주일 가량 지체되었고]] 이에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 그래도 사단장 직책을 유지한 채 부대 이동과 정비를 마친 8월 중순부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8월 31일에는 [[창녕]]과 [[영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강행도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고, 공세종말점을 지나 한계에 다다른 인민군은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와해되어 제각기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최현은 잔존병력을 규합해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한편 주력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자 멘붕에 빠져 있었던 김일성[* 최고사령관인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조차 제때 내리지 않고 남들보다 먼저 도망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고, 스탈린에게 찍혀서 시베리아로 유형갈 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은 최현이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유엔군의 추격을 조금씩 지연시키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장군들 중에서 [[연안파]]가 아닌 동북항일연군 출신(김일성 직계)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활약한 인물이었던 셈.[*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은 [[방호산]], [[김무정]] 등의 연안파나 [[남일]] 등의 소련파가 대부분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 그나마 유능한 인물로 [[김책]]이 있긴 있었으나 1951년에 일찍 죽어버렸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현보다 7살 연상인 [[최용건]]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남침을 반대했던 탓에 초기 작전수행은 김책이 주도했다. [[김광협]]도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으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에 제2군단장으로서 심각한 무능을 드러내어 김일성에게 빅엿을 먹였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중대급 비정규전 밖에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군단급 제대 지휘를 바라는 것부터가 도둑놈 심보다~~] 그 덕분인지 1950년 11월에는 [[김무정]]을 몰아내고 제2군단장(☆☆) 자리를 꿰찼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 전쟁 이후 === 1955년 12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대흥, [[한일무]], [[유성철(1917)|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으며 1958년 4월에는 내각 체신상의 자리에 올랐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장,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는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8년 중반에서 1969년 초에 있었던 '''군 수뇌부 숙청사건[* [[김신조 사건]]의 뒷풀이를 위한 대숙청이었다. 이때 김창봉, 허봉학, [[최광]] 등이 숙청되었다. 최광은 이 때 내쳐지고 7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복귀한다.]을 계기로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1970년 11월에 있었던 로동당 제7차 당대회 때에는 서열 5위의 정치위원으로 올라섰다.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당 정치위원·군사위원과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상의 개칭이자 북한의 국방부 장관), 군사부장,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막강한 직책들을 역임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1976년 5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주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동하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그 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을 맡은지 불과 한달 후인 4월 10일에 사망했다. == 장의위원회 구성 == * 위원: [[김일성]], [[오진우]], [[김정일]], [[리종옥]], [[박성철(1913)|박성철]], [[림춘추]], [[서철]], [[김중린]], [[김영남]], [[연형묵]], [[김환(북한)|김환]], [[오백룡]], [[전문섭]], [[강성산]], [[오극렬]], [[백학림]], [[허담]], [[현무광]], [[윤기복]], [[공진태]], [[최광]], [[정준기]], [[계응태]], [[최재우(북한)|최재우]], [[정경희(1928)|정경희]], [[최영림]], [[리근모]], [[조세웅]], [[서윤석(1928)|서윤석]], [[강희원]], 김강환, [[홍성남]], [[황장엽]], [[서관히]], [[허정숙]], [[홍시학]], [[홍성룡]], [[김두영(1922)|김두영]], [[김회일]], [[김창주(1922)|김창주]], [[김복신]], [[전병호(1926)|전병호]], [[태병렬]], [[리진수]], [[정동철(1909)|정동철]], 박영순, [[황순희]], [[김철만]], [[리을설]], [[조순백]], [[주도일]], [[리두익]], 양룡격, 장성우, [[조명록]], [[김일철]], 최상욱, 리정배, 김룡운, 조희원, [[리하일]], 리봉원, 한영옥, [[리영수]], [[김좌혁]], [[조명선]], [[김만금]], [[최인덕]], 오재원, 전문욱, 리두찬, 김봉주, [[김이훈]], [[김봉률]], [[박중국]], [[김광진(1927)|김광진]], 리병욱, [[김영춘(북한)|김영춘]], 김리창, 전진수, 려춘석, 리종우, [[박기서(북한)|박기서]], [[오룡방]], 리인덕, [[윤치호(1928)|윤치호]], [[옥봉린]], 정원교, 김용현, 김재문, 원명균, 권성린, [[최응록]], [[김룡연]], 허창숙, 왕옥환. == 대중매체에서 ==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탤런트 김순철이 연기했다. * 1990년작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장학수가 분했다. == 여담 == * 성격이 직선적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고. * 성격이 극도로 호전적이고 잔인하여 6.25 전쟁 발발 1년전인 1949년 봄 옹진지구 38 경비여단 지휘관으로 있을 때는 국사봉 고지에 설치된 100m짜리 전기 철조망에다 한국군 시체 3구를 매달아놓기도 했고, 그해 여름에는 남한측 백골부대(38 유격대)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면서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북측에선 그를 두고 '38선 호랑이', '부대장 아바이'라고 치켜세웠는데 본인은 그 호칭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정병준 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p.256~257)] *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을 하다가 숙청되어 중국으로 탈북한 강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에 임업소 지배인에게 자재를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다가 지배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일본놈 배급 받아먹던 놈 주제에 끝까지 안줄거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지배인이 그런 말이 어딨냐고 항의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배인을 쏘아죽였다고 한다. 이에 평안도가 발칵 뒤집어지고 놀란 김일성도 그를 평양으로 소환해 질책했지만 개새끼 한마리 죽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김일성에게도 대드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찌 고쳐지지가 않았다고. 주영복의 증언에서도 제재소 지배인 총살 사건이 언급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자재 문제가 아니라 최현이 만포제재소에서 난 화재의 원인을 지배인 김복명에게 추궁하자, 김복명이 실화일 뿐이라고 반발했고 이에 그 자리에서 쏘아죽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평양으로 소환되었다. 방원철 회고록에서는 개천 국영목재소 화재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8년에 남파공작원으로 발탁, 1970년에 체포되었던 김진계가 13사단 복무 시절인 1951년 9월에 2군단장 최현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함경도 출신임에도 서울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후 최현이 야전병원을 순시하더니 침상 밑이 왜 이렇게 더렵냐고 군의관을 질책하자 군의관이 담당병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최현이 하전사만 청소라라는 법이 어딨냐고 군의관에게 즉시 병실을 청소할 것을 지시했다. 군의관이 걸레질을 하고 나오자 최현은 군관도 직접 해봐야 하전사를 이해하는 법이라고 덧붙였고 이러한 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최현을 아주 좋아하면서 "군관에겐 범이오 전사에겐 아버지다"라고 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사였다. 김책과 최용건이 김일성의 선배격이라서 김일성이 존대한 형태라면 이 사람은 김일성과 동일선상에서 있던 형태.[* 대한민국에서의 사례를 찾자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정호용]]이 [[전두환]]에게 반말을 하는 것과 같은 사례라고 보면 편할 듯.]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숭배와 더불어 빨치산 회상기 학습을 열심히 하면서 김일성의 전우이며 민족보위상을 지내는 그 역시 절찬리에 강연에 불려다녔지만 말주변도 없는 자신을 왜 부르냐고 투덜거리면서 나오더니 빨치산 시절에 들은 갖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좌중을 경악하게 하곤 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수령 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에도 최현의 도움이 컸다. 1972년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원로들에게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묻자 최현이 "당연히 [[장남]]이 해야죠."라고 답한 것. 당시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___"수령님, 당연히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__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라고 했으며 그때 분위기가 경직되어 김정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원로 중 한명인 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 후계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 훗날 [[김정일]]은 최현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받게 도와준 보답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 김정일과 [[김정은(북한)|김정은]]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현재 북한의 의전 서열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사생아이다. 혼외관계로 최룡해를 낳자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최현,version=48)] [[분류:조선로동당 군정지도부장]] [[분류: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분류:1907년 출생]] [[분류:훈춘시 출신 인물]] [[분류:조선로동당 3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5기 정치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분류:북한 국방상]] [[분류:북한 국방성 부상]] [[분류:북한 체신상]] [[분류: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분류:북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분류: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분류:1982년 사망]] [[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보낼 RAW[include(틀:역대 북한 국방상)]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0000, #FF0000 20%, #FF0000 80%, #FF0000)" {{{#fff '''제4대 민족보위상[br]{{{+1 최현 }}}[br]崔賢 | Choi Hyu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hoihyun.jpg|width=100%]]}}} || ||<|2> '''출생''' ||[[1907년]] [[7월 15일]] (음력 6월 6일) || ||[[청나라|대청]] [[지린성]] [[훈춘시|훈춘현]] || || '''사망''' ||[[1982년]] [[4월 10일]] (향년 75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로, 이후 북한의 군인, 북한의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최룡해]]의 부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친위쿠데타에 가담하는 등의 공헌으로 [[인민무력상|인민무력부장]](1969년~1976년)까지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 생애 == === 유년기 및 일제강점기 === 1907년 7월 15일 중국 [[지린 성|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최득권이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 최룡해의 조부, 그의 고향은 [[https://m.cafe.daum.net/sisa-1/dqFG/64|양강도 혜산(대한민국 기준으로 함경남도 혜산)]] 출생.]으로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 이 때문에 최현을 가리켜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독립군 가문 출신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속해있는 항일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그 후 간도에 돌아와 민족주의 성향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에는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2년까지 [[연길시|연길]]의 감옥에 복역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현은 출소한 해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9월 그보다 5살 연하인 [[김일성]]과 처음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군사활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최현은 김일성의 눈에 들어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했고, 그 결과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이 됐다. 최현은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으로 김일성과 함께 1937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하지만 출중한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문맹이라서 지휘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어를 못했던 탓에, 방면군 사령관 지위에 이르렀던 김일성과 달리 그렇게까지 높은 지위를 차지하진 못했다. === [[한국 전쟁]] ===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 [[6.25 전쟁]] 전에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장(☆)이 됐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북한)|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1912)|김웅]], [[김일(북한)|김일]], 전태룡, [[최용진]], [[김무정|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6.25 전쟁]]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6월 26일 16시경에 대한민국 국군 17연대의 주력부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없이 최현의 눈 앞에서 배를 타고 최현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후퇴하였다.] 6월 27일, 최현 부대는 [[해주]]에 진입하였다. 그 후 [[개성시|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6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참조.] 7월에는 김일성에 의해 38선 경비여단장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제2군단장([[김광협]])과 그 예하의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보직해임하여[* 김일성은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쉽게 설명하면 군단장(☆☆☆)을 참모장(☆)으로 강등, 사단장(☆☆)을 여단장(***)으로 강등시킨 것과 비슷하다.] 제2사단장이라는 고위직책이 그에게 돌아왔다. 사실 인민군 2사단의 본래 계획은 춘천 방면을 빠르게 돌파한 뒤 서울 남측의 [[이천시|이천]]-[[수원시|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기동해 국군의 배후를 차단, 포위섬멸을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게다가 이들은 [[팔로군]]에서 인계받은 부대 정도를 제외하고 인민군 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 김일성의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이들이 첫 전투인 [[춘천 전투]]에서 전멸당함으로서 계획이 틀어졌고 이에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에서 최현으로 교체됐는데, 당시 그의 나이 겨우 43세였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북한군은 건군 초기인지라 [[리학구|20대 후반의 사단 참모장]], [[강건(북한)|30대 초반의 총참모장]], [[방호산|30대 중반의 군단장]] 등, 직급에 비해 나이가 많지는 않은 고위 군관들이 꽤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나이의 고위 장교들이 있는 현상은 똑같이 건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오|20대 후반의 사단장]]이라던가, [[백선엽|30대 초반의 4성 장군]]이라던가...][* 참고로 이 당시에 김광협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된 사람이 김일성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김무정]]이다.] 사단장이 된 최현은 재정비를 마친 2사단을 이끌고 꾸역꾸역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진천 전투|진천에서 김석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사단을 만나 진격이 일주일 가량 지체되었고]] 이에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 그래도 사단장 직책을 유지한 채 부대 이동과 정비를 마친 8월 중순부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8월 31일에는 [[창녕]]과 [[영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강행도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고, 공세종말점을 지나 한계에 다다른 인민군은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와해되어 제각기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최현은 잔존병력을 규합해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한편 주력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자 멘붕에 빠져 있었던 김일성[* 최고사령관인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조차 제때 내리지 않고 남들보다 먼저 도망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고, 스탈린에게 찍혀서 시베리아로 유형갈 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은 최현이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유엔군의 추격을 조금씩 지연시키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장군들 중에서 [[연안파]]가 아닌 동북항일연군 출신(김일성 직계)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활약한 인물이었던 셈.[*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은 [[방호산]], [[김무정]] 등의 연안파나 [[남일]] 등의 소련파가 대부분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 그나마 유능한 인물로 [[김책]]이 있긴 있었으나 1951년에 일찍 죽어버렸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현보다 7살 연상인 [[최용건]]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남침을 반대했던 탓에 초기 작전수행은 김책이 주도했다. [[김광협]]도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으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에 제2군단장으로서 심각한 무능을 드러내어 김일성에게 빅엿을 먹였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중대급 비정규전 밖에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군단급 제대 지휘를 바라는 것부터가 도둑놈 심보다~~] 그 덕분인지 1950년 11월에는 [[김무정]]을 몰아내고 제2군단장(☆☆) 자리를 꿰찼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 전쟁 이후 === 1955년 12월,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대흥, [[한일무]], [[유성철(1917)|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으며 1958년 4월에는 내각 체신상의 자리에 올랐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장,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는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8년 중반에서 1969년 초에 있었던 '''군 수뇌부 숙청사건[* [[김신조 사건]]의 뒷풀이를 위한 대숙청이었다. 이때 김창봉, 허봉학, [[최광]] 등이 숙청되었다. 최광은 이 때 내쳐지고 7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복귀한다.]을 계기로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1970년 11월에 있었던 로동당 제7차 당대회 때에는 서열 5위의 정치위원으로 올라섰다.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에는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당 정치위원·군사위원과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상의 개칭이자 북한의 국방부 장관), 군사부장,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 막강한 직책들을 역임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1976년 5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주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동하면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그 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을 맡은지 불과 한달 후인 4월 10일에 사망했다. == 장의위원회 구성 == * 위원: [[김일성]], [[오진우]], [[김정일]], [[리종옥]], [[박성철(1913)|박성철]], [[림춘추]], [[서철]], [[김중린]], [[김영남]], [[연형묵]], [[김환(북한)|김환]], [[오백룡]], [[전문섭]], [[강성산]], [[오극렬]], [[백학림]], [[허담]], [[현무광]], [[윤기복]], [[공진태]], [[최광]], [[정준기]], [[계응태]], [[최재우(북한)|최재우]], [[정경희(1928)|정경희]], [[최영림]], [[리근모]], [[조세웅]], [[서윤석(1928)|서윤석]], [[강희원]], 김강환, [[홍성남]], [[황장엽]], [[서관히]], [[허정숙]], [[홍시학]], [[홍성룡]], [[김두영(1922)|김두영]], [[김회일]], [[김창주(1922)|김창주]], [[김복신]], [[전병호(1926)|전병호]], [[태병렬]], [[리진수]], [[정동철(1909)|정동철]], 박영순, [[황순희]], [[김철만]], [[리을설]], [[조순백]], [[주도일]], [[리두익]], 양룡격, 장성우, [[조명록]], [[김일철]], 최상욱, 리정배, 김룡운, 조희원, [[리하일]], 리봉원, 한영옥, [[리영수]], [[김좌혁]], [[조명선]], [[김만금]], [[최인덕]], 오재원, 전문욱, 리두찬, 김봉주, [[김이훈]], [[김봉률]], [[박중국]], [[김광진(1927)|김광진]], 리병욱, [[김영춘(북한)|김영춘]], 김리창, 전진수, 려춘석, 리종우, [[박기서(북한)|박기서]], [[오룡방]], 리인덕, [[윤치호(1928)|윤치호]], [[옥봉린]], 정원교, 김용현, 김재문, 원명균, 권성린, [[최응록]], [[김룡연]], 허창숙, 왕옥환. == 대중매체에서 ==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탤런트 김순철이 연기했다. * 1990년작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장학수가 분했다. == 여담 == * 성격이 직선적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고. * 성격이 극도로 호전적이고 잔인하여 6.25 전쟁 발발 1년전인 1949년 봄 옹진지구 38 경비여단 지휘관으로 있을 때는 국사봉 고지에 설치된 100m짜리 전기 철조망에다 한국군 시체 3구를 매달아놓기도 했고, 그해 여름에는 남한측 백골부대(38 유격대)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면서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북측에선 그를 두고 '38선 호랑이', '부대장 아바이'라고 치켜세웠는데 본인은 그 호칭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정병준 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p.256~257)] *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을 하다가 숙청되어 중국으로 탈북한 강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에 임업소 지배인에게 자재를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다가 지배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일본놈 배급 받아먹던 놈 주제에 끝까지 안줄거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지배인이 그런 말이 어딨냐고 항의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배인을 쏘아죽였다고 한다. 이에 평안도가 발칵 뒤집어지고 놀란 김일성도 그를 평양으로 소환해 질책했지만 개새끼 한마리 죽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김일성에게도 대드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찌 고쳐지지가 않았다고. 주영복의 증언에서도 제재소 지배인 총살 사건이 언급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자재 문제가 아니라 최현이 만포제재소에서 난 화재의 원인을 지배인 김복명에게 추궁하자, 김복명이 실화일 뿐이라고 반발했고 이에 그 자리에서 쏘아죽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평양으로 소환되었다. 방원철 회고록에서는 개천 국영목재소 화재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8년에 남파공작원으로 발탁, 1970년에 체포되었던 김진계가 13사단 복무 시절인 1951년 9월에 2군단장 최현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함경도 출신임에도 서울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후 최현이 야전병원을 순시하더니 침상 밑이 왜 이렇게 더렵냐고 군의관을 질책하자 군의관이 담당병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최현이 하전사만 청소라라는 법이 어딨냐고 군의관에게 즉시 병실을 청소할 것을 지시했다. 군의관이 걸레질을 하고 나오자 최현은 군관도 직접 해봐야 하전사를 이해하는 법이라고 덧붙였고 이러한 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최현을 아주 좋아하면서 "군관에겐 범이오 전사에겐 아버지다"라고 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사였다. 김책과 최용건이 김일성의 선배격이라서 김일성이 존대한 형태라면 이 사람은 김일성과 동일선상에서 있던 형태.[* 대한민국에서의 사례를 찾자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정호용]]이 [[전두환]]에게 반말을 하는 것과 같은 사례라고 보면 편할 듯.]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숭배와 더불어 빨치산 회상기 학습을 열심히 하면서 김일성의 전우이며 민족보위상을 지내는 그 역시 절찬리에 강연에 불려다녔지만 말주변도 없는 자신을 왜 부르냐고 투덜거리면서 나오더니 빨치산 시절에 들은 갖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좌중을 경악하게 하곤 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수령 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에도 최현의 도움이 컸다. 1972년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원로들에게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묻자 최현이 "당연히 [[장남]]이 해야죠."라고 답한 것. 당시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___"수령님, 당연히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__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라고 했으며 그때 분위기가 경직되어 김정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원로 중 한명인 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 후계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여지없이 박살이 나버렸다. * 훗날 [[김정일]]은 최현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받게 도와준 보답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 김정일과 [[김정은(북한)|김정은]]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현재 북한의 의전 서열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사생아이다. 혼외관계로 최룡해를 낳자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최현,version=48)] [[분류:조선로동당 군정지도부장]] [[분류: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분류:1907년 출생]] [[분류:훈춘시 출신 인물]] [[분류:조선로동당 3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5기 정치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분류:북한 국방상]] [[분류:북한 국방성 부상]] [[분류:북한 체신상]] [[분류: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분류:북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분류: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분류:1982년 사망]] [[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 [include(틀:포크됨, title=최현(북한), version=164)]더위키에 나무위키판으로 포크됨